[근대미술 산책] 木朗 최근배 作-설경

입력 2010-02-20 07:53:08

어둡게 내려앉은 흐린 하늘 아래 눈덮힌 지붕들

목랑(木朗) 최근배(崔根培)(1910~1978)

설경

패널 위에 유채, 33×27.7㎝

1935년

개인 소장

어떤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작연대나 작가를 밝히는 귀속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미 주어진 정보가 있더라도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해야 하며 아무 참고자료가 없다면 작품 그 자체만으로도 귀속을 위한 추정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미술사의 과제다. 그런데 이처럼 출처가 확실하고 서명과 제작 연도까지 있는 경우라면 그 다음 주제의 해석은 한결 풍부해진다.

이 작품은 섬세하고 감각적인 채색수묵화로 잘 알려진 목랑의 기존 화풍과 비교할 때 아주 이례적이다. 그림 하단에 적힌 알파벳 'MokRang'은 같은 유화로 제작된 1941년 작 자화상의 사인과 동일하다. '木朗'(목랑)은 더 이른 시기 그의 시첩 수고(手稿)들에 이미 쓰고 있던 아호다. 그는 함경도 명천 출신으로 1931년 동경 니혼(日本)미술학교에 입학해 처음 양화를 전공했으나 뒤에 동양화로 전과하였다. 이 작품을 비롯해 함께 발견된 유화 몇 점이 재학시절을 포함해 그의 초기 작업의 성향을 전해주는 유일한 증거들이다.(이 그림들이 발굴된 경위는 놀랍다. 작가의 탄생 100주년 회고전을 준비하던 어느 날 발생한 불의의 화재 뒤에 극적으로 찾은 진기한 사연을 지녔다) 1935년 2월은 그가 대학 졸업을 한 달 정도 앞둔 시점이니 이 소품은 아마도 우에노 근방 어느 동네의 풍경인 듯하다.

유화로 그린 이 묵직한 분위기의 설경이 주는 느낌은 그동안 보아 온 서화나 수채화의 담담한 맛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우리 근대미술이 일본에서 처음 접한 양식이 인상주의라고 했는데 그 재현적인 자연주의 양식의 특징으로부터 이 그림은 많이 벗어나 표현주의적 기법과 정서가 강하게 드러난다. 유화는 섬세한 묘사를 위해서 물감이 건조되기를 기다려가며 중복해서 그려야 하는 재료다. 그러나 두텁게 칠해진 이 그림의 물감자국은 한 번에 완성한 듯 일회적 붓질로 마무리되어 있다. 야수파나 독일 표현주의에 가깝지만 차이라면 그런 양식의 출현 배경과 무관하게 단순하고 차분해 보인다. 아카데믹한 전통에 대한 거부나 사회비판적 시각에 수반하는 거친 힘이나 격정적인 감정의 동요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윤곽의 둔중한 선묘나 생략된 형태의 표현에서 공통된 인상을 받을 뿐 심리적으로 그들의 양식에 철저하게 공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 무렵 일본의 동양화를 함께 수학한 데서 짐작할만하다.

그렇지만 식민지에서 온 가난한 미술학도의 실존적 상황은 더 이상 행복한 화가의 그림인 인상파나 아카데믹한 이상주의를 따를 수는 없었으리라. 1930년대 중반 일본 화단도 새로운 유파의 도입이 활발했지만 이 양식 특유의 분위기는 당시의 힘든 현실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고통스런 내면세계와 분명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설경은 침묵과 고요함으로 상징되며 모든 것이 정지되고 어떤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는 정경을 나타낸다. 비록 이 그림의 장면은 상징이 아닌 창문으로 내다본 현실의 시각상일 테지만. 붉은 벽돌 건물의 각진 지붕위에 두텁게 쌓인 눈의 두께로 미루어 대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히말라야시더와 같은 침엽수, 지붕의 박공도 눈의 무게에 저항하지 못한 채 눌려있다. 그는 졸업 후 귀국해서 이 초기 유화의 표현주의와는 아주 다른 채색수묵화의 세계를 펼친다. 두 매체의 재료와 기법의 차이만큼 지향하는 정신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런 세련되고 섬세한 필치의 감각적인 화면으로 나아갔는지, 거기엔 미학적 판단의 과제가 함께 놓여 있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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