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門에서 華岳까지](8)기와미기 애환사

입력 2010-02-19 08:54:18

1961년 개척귀농 50가구 맨손으로 황무지 일궈 입에 풀칠

와항마을 등 경주 산내면 대현리 여러 자연마을들이 자리한 범곡천 계곡. 문복산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곳 땅 모양이 둥그스름하다고 해서
와항마을 등 경주 산내면 대현리 여러 자연마을들이 자리한 범곡천 계곡. 문복산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곳 땅 모양이 둥그스름하다고 해서 '기와목'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옛 어른들의 혜안이 실감된다. 저 뒤에 고헌산이 솟아있다.

낙동정맥은 단석산~백운산~고헌산을 무던히 지나왔지만 그 이후 구간에선 한동안 변덕이 심하다. 북에서 남으로 향하던 흐름부터가 동에서 서로 옆걸음 한다.

등락세도 급해져 고헌산 최고 1,035m봉을 지나자마자 535m 정도의 재로 무려 500여m나 내리꽂는다. 이어 건너편 산줄기가 출발하는 720m봉으로 올랐다가 해발 500m쯤의 더 낮은 잘록이로 두 번째 내려앉는다. 숙달된 산꾼들마저 맥을 놓쳐 헤매기 일쑤인 곳이다.

그러던 산줄기가 마지막 올라서는 곳은 895m봉이다. 거기서는 소문난 '문복산'(1,014m)을 거쳐 이어가며 일대 판세를 가르는 산줄기가 하나 뻗어간다. 단석산 이남의 낙동정맥과 이 산줄기를 연결하면 대체로 삼각형 땅이 구분된다. 고헌산~895m봉이 밑변, 단석산~고헌산 구간 낙동정맥 산줄기가 한 빗변, 문복산줄기가 다른 빗변이다.

그 안에는 무려 40리나 되는 긴 골이 형성돼 있다. 거기로 흐르는 '범곡천'이라는 장장한 물길은 사실상 산내면 소재지 마을까지 이어진다. '범곡'은 '범골'로도 불린다는 대현리(大賢里)의 한 자연마을 이름이다. 범곡천 계곡 대부분은 그 마을로 포괄돼 있다.

하지만 이건 크게 잡은 윤곽이고, 자세히 보면 그 골의 절반 이상에 달하는 구간은 다시 범곡천-소호천 둘로 나뉘어져 있다. 앞서 정맥 등락 때 잠깐 올랐던 720m봉에서 출발하는 산줄기가 분계령이다. 그 모습은 골 하류서 올라가며 살피는 게 편하다.

산내면 소재지 마을서 거슬러 오르면, 물길은 얼마 안 가 먼저 200도가량 한바퀴 휘돌아 방향을 반대로 바꾼다. 그 굽는 구간 내 건너 북편, 단석산 줄기 서편 기슭에 '소태'라는 마을이 자리 잡았다. 산내면 내일리(乃日里)의 한 자연마을이다.

그곳은 다른 내일리 마을들이 자리한 두 개의 골로 들어가는 통문(通門)이다. 하나는 앞서 살핀 OK수련원이 있는 골, 다른 하나는 '상목골'이다. 상목골은 1914년 이전엔 낙동정맥 너머 내남면에 속했다. 둘 사이의 '상목골재'(460m)가 그만큼 낮아 넘어 다니기 좋다는 뜻이다.

소태 구간 이후 물길은 '대현지'라는 큰 저수지를 지나면서 대현리 땅으로 들어선다. 조금 뒤 보건진료소가 있는 '서편(西片)마을'에 도달하는바, 거기가 범곡천과 소호천의 합류점이다.

그 중 소호천 계곡으로 들어서면 먼저 대현리 '시다마을'을 지나고 '태종마을'에 닿는다. 소호천 계곡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그 하류는 경주 대현리, 상류는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蘇湖里)다. 태종마을 자체도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시·군으로 나뉜다.

소호리 구간은 백운산 구간과 맞아떨어진다. 태종마을서 올라서는 태종고개와 소호리 마을 끝 소호령 사이에 솟은 게 백운산 덩어리인 것이다. 그 산 기슭을 감아 도는 임도가 두 재를 연결해 준다. 넓어서 자동차도 쉽게 다닌다.

소호리는 4개 자연마을에 실 거주 120여 가구, 주민등록 기준 174가구 340명이 사는 넓은 권역이다. 그러나 경주 산내면 대현리와는 이웃해 살면서도, 같은 울주 상북면의 다른 마을로 가려면 낙동정맥을 넘어야 한다. 불과 20~30년 전에는 소호령 너머 울주군 두서면에 속해 있기도 했었다.

이 불안정한 위상은 근본적으로 수계(水系) 불일치에서 초래된 느낌이 짙다. 앞서 고헌산 남사면의 경주 땅 물이 울산으로 흐른다고 했지만, 이곳 소호리는 울산 땅이면서도 물은 경주(산내)로 흐른다. 경주에 속하는 게 더 합리적일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소호천 골의 끝 고헌산은 동창천의 발원지다. 소호리 물을 원류로 한 소호천은 동창천의 본류다. 출구에서 가장 먼 지점을 하천 발원지로 잡고 거기서 출발하는 물길을 본류로 보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 조건 탓에 소호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랭지 감자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산간 벽지였다고 했다. 하나 지금은 전원주택과 펜션들로 별천지가 됐다. 물 맑고 산세 좋다면 산촌일수록 인기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결과다.

길이에서 뒤져 동창천 본류의 자리를 뺏기긴 했으나, 규모에선 그보다 훨씬 큰 게 범곡천이다. 여름철 피서객을 기다리는 휴양시설들도 이 골에 더 많다. 특히 골 최고점에는 심심산중인데도 불구하고 불고기단지가 형성돼 있기까지 하다. 앞서 봤던 해발 500여m의 재 일대가 거기다.

그곳을 사람들은 '외양말랭이'라 불렀다. 산내서도 그랬고 인접 소호리나 재 너머 울주 삽재마을서도 그랬다. 한 술 더 떠 '양말랭이'로 더 줄여 쓴 민간지도도 있다. '외양 꼭대기'란 뜻이다.

하지만 '외양'이라 지칭된 것은 대현3리 네 자연마을 중 하나인 '와항'(瓦項)이다. '경북마을지'는 기와 굽는 흙이 많이 생산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항간의 얘기를 채록해 뒀고, 산내면 지명 유래지는 일대 지형이 기와처럼 생겨 '기와목'으로 불렸다는 얘기를 함께 싣고 있다. '기와목'의 한자 표기가 와항이다.

둘 중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건 기와목 유래설이다. 우리네 기왓장은 평면이 아니라 둥글게 굽었다. 그래서 부드럽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와항 일대 지형이 꼭 그렇다. 널찍한 골이 그 양편 높고 긴 능선들과 둥그스름하게 어울린다. 그곳이 목(재) 부분이니 기와 와(瓦) 자에 목 항(項) 자를 붙이면 자연스레 '와항'이 될 터이다.

54년 전 시집왔다는 현지 할머니에 따르면, 와항 마을은 번성기 때 30여 호나 됐다. 해발 500m를 넘는 산비탈이지만 밭은 물론 논까지 숱했다. 그러나 지금 남은 것은 겨우 8~9호. 할머니가 가리켜 보인 논자리는 거의 풀숲으로 변한 듯했다.

도로로 주행하는 외지인들은 이제 그곳에 오래된 마을이 있는 줄조차 알아채기 힘들다. 문복산줄기 높은 곳에 붙은데다, 저 아래 길 따라 많은 유락시설들이 들어서서 빛을 가리기 때문이다. 옛 마을 윤곽이나마 유지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싶을 정도다.

증언들을 종합하면, 이 마을에 처음 찾아온 변화 바람은 1961년 군사정부가 주도한 '개척귀농'이었다. 와항 마을 주변 문복산줄기 비탈 억새밭 30만 평이 그 정착지였다. 현재 불고기단지로 변해 있는 와항 마을 남쪽 고개 정점 일대를 A지구, 와항 북편 범곡천 하류 구간을 B지구 C지구 등으로 나눴다.

거기다 방·부엌 하나씩인 함석집 50채를 지은 정부는, 서울·대구 등등에 살던 50가구를 이주시켰다. 이사는 한밤중 군부대 트럭으로 진행됐다. A·B·C지구에 각 15·20·15가구가 배정됐고, 각 가구에는 땅 6천 평씩이 무상 임대됐다.

개척자들은 맨손에 괭이만 들고 그 황무지를 일궜다. 주 작목은 조·감자였다. 감자는 가구당 적어도 100가마 이상 수확해 주식이 됐다. 하지만 너무 살기 힘들었다. 함석지붕은 태풍만 닥치면 날아가 버렸다. 2세들 중 지금껏 머물러 사는 사람은 겨우 7~8가구뿐이다. 최초 이주자들은 대개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닥친 바람은 불고기식당 단지로의 변화였다. 1970년대 이후 고랭지 채소 농사가 성행한 뒤 그 매집 상인을 염두에 두고 A지구에 한 식당이 1989년 문을 연 게 시초였다. 다른 식당들도 속속 뒤를 이었다. 일대는 이제 '불고기단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세 번째 변화는 지난 4~5년 전 시작했다. 전원주택 바람이다. 고헌산을 앞산 삼고 문복산은 물론 가지산까지 지척이니 휴양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을 테다. 이곳의 앞날은 분명 그 쪽에 있을 듯하다.

이렇게 변화해 온 와항 마을에서 이름을 따 '외양말랭이'라 불리는 고개는 옛날부터 소문난 큰 고개였다. 대현리라는 마을의 한자 표기가 본래는 '큰 고개'를 뜻하는 '大峴里'였다는 게 그 증거다. 하지만 이 고개는 아직도 제대로 된 고유명칭을 못 얻었다. 일대 사람들이 '외양말랭이'라 부르고, 일부에서 'A지구'라 지칭하며, 산꾼들이 '불고기단지'라고 두루뭉술하게 가리키는 게 모두 그래서 초래된 혼란의 결과다.

일부에선 '와항재'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게 맞겠다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혼란이 더 커지니 또 고민스럽다. 소호리와의 사이에 있는 535m재를 그쪽 사람들이 이미 '와항재'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와항마을로 넘어가는 재'라는 뜻일 터이다.

그래서 큰 고개 이름은 '기와목'으로 고정시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습이 기와를 닮았음을 간파한 옛 어른들의 혜안까지 계승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토속 발음방식을 따라 '기와미기'라 하면 느낌이 더 잘 살아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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