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님 각막 받은지 1년 세상 눈뜨니 사랑 보였죠"

입력 2010-02-17 10:26:51

김수환 추기경 각막 기증받은 70대 '감사의 1년'

"추기경님께서 사랑과 나눔의 정신으로 주신 큰 은혜 덕분에 저는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얻었지요. 그날 이후 추기경님에 대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기(16일)를 맞아 전국적으로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안동에 사는 권모(72)씨의 감회는 유달리 남다르다. 김 추기경이 기증한 각막을 이식받아 캄캄한 어둠 대신 환한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기사 3면.

권씨는 40여년 전 냉동창고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왼쪽 눈에 들어간 암모니아가 각막 혼탁을 일으켜 10년 후엔 거의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른쪽 눈도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2007년 초 외국에서 들여온 각막을 기증받아 한차례 이식수술을 받았지만 수술 후 백내장 등 부작용에 시달렸다. 결국 최선의 치료는 다시 새 각막을 이식받는 것밖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 '그날'의 일을 권씨와 그의 가족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난해 2월 17일, 이른 아침 서울 가톨릭대 성모병원에서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김 추기경과 권씨가 각막을 주고 받는 소중한 인연을 맺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가족들과 급히 서울로 간 권씨는 곧바로 수술대에 올랐다. 4시간여의 수술은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권씨와 가족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각막을 기증한 은인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못했다. 뉴스로 김 추기경의 각막 기증 소식을 접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만 했다. 퇴원을 앞두고서야 병원 측에서 이식한 각막이 선종한 김 추기경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선물'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권씨와 가족들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권씨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촌로에게 추기경님은 너무도 큰 선물을 주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각막을 기증받아 수술을 받은 때를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에 앞서 가슴이 벅차고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어요. 지난 1년 동안 추기경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권씨에게 추기경이 선물한 각막은 삶의 희망을 북돋워줬다. 다행히 추기경의 각막은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잘 이식됐다. 요즘은 3개월에 한 차례씩 안과 병원에 들러 검사를 받고 있다. 이식받은 왼쪽 시력이 한결 맑고 환해졌다고 한다.

권씨는 "어렸을 때 자주 안동 목성동 성당을 지나곤 했는데 이식 수술 후 추기경께서 목성동 성당에서 처음으로 사목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매우 놀랐지요.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평생 종교를 갖지 않고 살았는데 앞으로 성당에 나갈 생각입니다. 추기경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고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삽니다." 권씨와 가족들은 김 추기경 선종 1주기를 맞은 16일 세상을 볼 수 있는 빛을 주고 간 추기경에 감사하며 조용한 기도로 하루를 보냈다. 기자의 사진 촬영 요청에 권씨는 그동안 수많은 기자들이 찾아왔지만 부담감 때문에 사진 촬영에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며 극구 사양했다.

한편 김 추기경의 또 다른 한쪽 각막을 이식받은 A(74·서울)씨는 죽기 전 자녀와 손자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소원을 풀었다. 앞으로 추기경의 삶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살아야겠다는 심경을 언론에 밝히기도 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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