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지식인' 윤치호는 현실적 애국자?
전통적으로 연구자들은 점령 세력에 대한 피정복민의 태도를 '저항과 협력' 둘 중 하나로 평가했다. 저항은 용기와 희생으로 치장돼 신화가 된 반면, 협력은 불명예스러운 것, 병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유럽에서는 1970년대 이후 '저항'과 '협력'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그 결과 저항과 협력의 경계가 무척 모호하다는 것 즉, 저항과 협력 사이에 광범위한 회색지대가 존재한다는 점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점령자와 '협력'은 친일파 문제와 얽혀 있어 진지한 학문적 토론이 불가능한 채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되거나 악용돼왔다.
윤치호(1865~1945)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지도자였다. 동시에 그는 가장 지탄받는 친일파 거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은이 박지향은 "그러나 윤치호가 대일협력에 이르는 길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것보다 훨씬 복잡했고, 그 동기는 일신상의 영화보다 훨씬 다양했다"고 밝힌다. 지은이가 '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윤치호는 1865년 충남 아산에서 윤웅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 윤웅렬은 군부대신을 역임했으며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와 별기군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됐다. 윤치호는 1897년부터 독립협회 활동을 시작, 2대 회장을 지내고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독립신문을 발간했으며 만민공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독립협회 운동이 실패한 뒤 5년간 지방관을 지내다가 외부협변으로 임명됐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08년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해 교장으로 교육에 힘썼다. 데라우치 마사타게 총독 암살음모 사건에 연루돼 1912년부터 3년간 수형생활을 했다.
윤치호는 당시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기독교 신자로 자유주의 사상을 가졌던 그는 공산주의를 혐오했으며, 개인을 중시했다. 서양 근대문명에 정통했던 그는 이상적인 근대국가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독립국가'는 다수의 조선인처럼 추상적인 게 아니라 구체적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국가는 부유하고 강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공덕심이 있고,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성숙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독립을 얻더라도 유지할 수 없으며, 국민이 독립정신을 확립하지 않으면 외국이 언제라도 간섭하리라고 확신했다. 보통 조선인에게 독립국가라는 외형이 중요했다면 윤치호에게는 국가의 내용이 더 중요했다.
윤치호가 대일 협력에 나섰던 것은 일본의 탄압이 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양제국주의나 일본제국주의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창궐하는 세상에서 대일 협력만이 조선 민족이 살아남을 길이라고 믿었다.
좋은 교육을 받았던 그는 국제관계의 작동 방식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이 독립하려면 실력을 키우고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믿었다. 만세를 부르고,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변경에서 소소한 무력투쟁을 벌인다고 조선에 독립이 오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윤치호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현실과 타협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지만, 현실주의자라는 이유가 비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윤치호의 눈에는 '임시정부야말로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지은이는 말한다.
'윤치호는 조선의 암담한 미래를 슬퍼했고, 아름다운 조선을 사랑했다. 정력적이고 공격적인 침입자들에 대항해 생각 없고 힘없고 심지가 굳지 못한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를 평생 고민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체의 이유를 막론하고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을 증오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 윤치호는 증오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므로 증오는 나쁘다고 가르쳤다. 그는 지적으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조선 사람들이 똑똑한 시민이 되는 것이 일본에 대한 증오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밝혔다.
우리가 윤치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친일파였다'는 사실뿐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윤치호가 그토록 쓸모없다고 역설한 '증오'에 여태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친일청산은 '반드시 해야 하며, 제대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오가 아니라 기록과 배움의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 지은이 박지향은 1953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및 동대학원,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40쪽, 1만3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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