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
해마다 5월이면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주 인구 30만명의 소도시 오마하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특별한 주주총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참석하는 투자 달인의 한마디를 들으려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다.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미국의 억만장자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이 노신사 한 사람때문에 조그만 도시에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것이다.
지난해엔 경기 침체와 신종 인플루엔자 전염 공포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3만5천여명이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시골마을 오마하로 향하는 항공권은 1개월 전부터 동났고 인근 호텔에는 빈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훌륭한 인물 한명이 도시의 운명을 바꿔놓는 좋은 사례다.
대구도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을 '대구의 인물'로 주목하고 있다. 그가 대구에서 삼성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올 초 대구 상공인들과의 간담회에서 "대구도 이제 대표 인물 브랜드를 키워야 한다"고 했다.
김 시장은 대표 인물 브랜드로 호암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주저않고 지목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반드시 대구의 인물 브랜드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호암의 기념행사가 11일 대구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이유다.
◆호암, 대구에서 삼성을 시작하다
꼭 100년 전인 1910년 2월 12일에 태어난 호암은 만 28세 때인 1938년 3월 1일 대구 중구 인교동 61-1번지(당시 수동, 현재는 이른바 '오토바이 골목' 끝자락)에 큰 가게를 세웠다. 지상 4층, 지하 1층의 목조건물이었다. 간판에는 '삼성상회'라고 씌어 있었다. 자본금은 3만원. 호암이 글로벌 기업 삼성의 출발지로 대구를 선택한 것이다.
호암은 삼성상회 창업 전 2개월 동안 중국과 북한지역을 돌면서 어떤 사업을 할까 고민했다. 결론은 무역업이었다.
그리고 무역업의 최적지는 대구라고 생각했다. 영남의 한가운데 위치한 대구는 각종 농수산물과 화물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경부철도를 비롯해 각종 기반시설이 일찍부터 건설돼있었다. 대구만한 경제도시가 없다는 것이 호암의 판단이었다.
삼성상회는 대구 근교에서 수집한 청과물과 포항 등지에서 들여온 건어물을 중국과 만주에 수출했다. 제분기와 제면기도 설치, 국수도 만들어냈다.
호암은 이웃 상인들이 깜짝 놀랄만한 구매·판매·관리기법을 동원, 삼성상회를 착실하게 성장시켰다. 삼성상회가 만든 별표국수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별표국수의 가격은 다소 비쌌지만 별표국수의 매출은 경쟁회사를 멀찍이 따돌렸다. 맛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삼성이 그런 것처럼 호암은 싼 물건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어야한다는 품질경영을 사업초기부터 강조했다.
성장을 거듭한 호암의 삼성상회는 1941년 6월 3일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등록, 근대적인 기업 형태까지 갖췄다. 특히 삼성상회는 40여명의 종업원이 근무하면서 사장-지배인-사무직-생산직 등으로 업무를 구분, 사업초기부터 체계적인 기업 체계를 만들어냈다.
◆호암의 대구 추억
삼성상회를 설립했을 초기, 호암은 달성 출신의 아내 박두을 여사와 장녀 인희, 장남 맹희, 차남 창희, 차녀 숙희 등 모두 5명의 가족을 두고 있었다. 호암이 삼성을 대구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삼성그룹을 비롯해 한솔그룹·CJ그룹 등 현재 범 삼성가(家)를 이루고 있는 호암의 자녀들이 거의 모두 대구를 거쳐간 것이다. 삼남인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1942년생) 역시 대구 삼성상회 시절 태어났다.
삼성상회 건물은 1997년 노후건물로 지목돼 헐렸으나 호암의 대구 생활 당시 살았던 집은 아직도 삼성상회 터 부근인 오토바이 골목 안쪽(중구 인교동 164-8번지)에 있다.
이 집은 호암이 대구를 떠난 뒤(호암은 해방 직후인 1947년 5월 서울로 사업 근거지를 옮겼다) 다른 사람에게 팔렸으나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인 1990년대 초 이 회장의 지시로 재매입이 이뤄졌다. 현재는 제일모직 직원인 이항년씨가 살면서 집을 관리하고 있다. 이씨는 "이 집에서 호암이 사셨고 이건희 회장까지 난 만큼 이 집을 대구의 자랑거리로 만들어 널리 알려야한다"고 했다.
호암은 대구에서 실업인들의 모임인 을유회에 가입하고 을유회 사람들과 함께 대구민보라는 신문사도 운영했으며 대구대학(영남대 전신)도 인수, 삼성을 시작한 대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삼성그룹의 연고지는 대구다
호암은 1954년, 해방 이후 단일 공장 규모로는 대한민국 최고였던 제일모직의 입지로 대구 침산동을 선택했다.
호암은 호암자전의 회고를 통해 "창립 당시 무려 23만1천404㎡(7만평)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로 계획됐던 제일모직의 입지를 어디로 할까 오랫동안 고심했다"고 말했다. 워낙 규모가 크고 선진국인 영국이나 할 수 있었던 모직 제조 사업을 한국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서울로 사업 근거지로 옮겼지만 삼성의 출발지인 대구의 침산동을 제일모직의 입지로 선택했다.
대구를 최종 선택했지만 호암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호암자전 회고를 보면 "모직공장은 온도, 습도, 수질이 중요한 체크 포인트인데 대구는 사계절의 기온차가 유난히 심했다. 기후가 이렇다 보니 공장 안의 온도·습도를 맞추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써야 했다. 물은 배관을 묻어 수km나 떨어진 곳에서 끌어왔다"고 돼있다.
대구가 기후조건 등을 볼 때 모직공장으로는 불리한 입지였지만 호암은 삼성의 출발지 대구를 대한민국 최대 공장의 입지로 정한 것이다.
호암의 대구경북 사랑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정부로부터 '한국전자통신'을 인수, 삼성전자 구미공장으로 변모시킨 뒤 구미를 전자통신산업의 국제 메카로 키워냈다. 삼성전자 구미공장은 1980년대 초반까지 전화 한대 개통하는데 양옥 한채 값을 지불해야했던 만성적 전화 개통 적체 현상을 일시에 해소하면서 전국민 전화시대를 열게했다. 삼성전자 구미공장이 애니콜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토양을 갖춰놓은 것. 삼성전자 구미공장은 전 세계에 11억대의 삼성 휴대전화를 판매, 전 세계 인구 6분의 1이 삼성 휴대전화를 구경하게 만들었다.
호암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삼성라이온즈의 연고지도 대구로 했다.
◆호암을 대구의 인물 브랜드로
호암 기념사업을 기획한 이인중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은 "호암이 대구에서 삼성을 시작한 것은 대구의 자랑"이라며 "호암이 대구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기업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대구시와 협조, 호암을 기리고 대구의 상징으로 삼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하춘수 대구은행장은 "우리 지역이 낳은 삼성이 선진국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적인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세계인이 다 아는 사실"이라며 "최고를 지향하고 사람을 중시하며, 미래를 대비하고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한 혁신경영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호암 이병철 회장의 뛰어난 기업가 정신을 대구 기업인들이 본받아야하며 대구를 상징하는 브랜드로 키워야한다"고 말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1910.2.12.~1987.11.19.)= 경남 의령군의 1천섬 지기 부농(富農)인 이찬우(李纘雨)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중동중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政經科)를 중퇴했다.
이후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설립, 정미업으로 사업에 첫발을 들여놓았다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업하면서 '삼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다.
해방 후 사업근거지를 서울로 옮겨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만들고 1953년 제일제당, 1954년엔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1969년엔 삼성전자를, 1973년엔 삼성코닝을, 1977년엔 삼성종합건설과 삼성조선을 만드는 등 경공업에서 중화학 및 첨단정밀산업까지 우리나라 산업화·근대화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혁명적 사업 행보를 이어왔다. 그의 노력 덕분에 삼성은 국내 1등 기업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은 물론,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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