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오늘, 친일파 수괴 이완용(1858~1926)이 경성 옥인동 자택에서 죽었다. 조국과 민족을 팔아 호의호식하다가 평안한 임종을 맞았으니 세상사가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을까. 장례는 일본 순사들의 호위 속에 호화롭게 치러졌는데 고종황제의 장례와 맞먹을 정도였다.
전북 익산시 낭산면에 묻혔으나 묘가 계속 훼손되는 바람에 순사들이 경비를 서야 했다. 해방 후 소풍온 초교생들이 묘를 짓밟고 수시로 파헤쳐지자 1979년 증손자가 유골을 화장, 묘가 없어졌다. 이완용과 아들, 손자 3대가 친일에 앞장서면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완용은 현금만 300만원(현재 가치 600억원)을 보유한 '조선의 현금왕'이었고 아들도 씀씀이가 큰 조선 제일의 부자였다.
그러나 가족과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돌팔매를 맞았다. 장손 이병길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고 또 다른 손자 이병주는 멸시를 견디다 못해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귀화했으며 증손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직계 후손이 뿔뿔이 흩어지고 가문조차 보전하지 못한 것으로 매국의 죄과를 일부나마 치른 셈이다.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을망정 그 더러운 이름은 천년을 가도 지워지겠는가.
박병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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