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많이 낳기와 잘 키우기

입력 2010-02-01 11:14:02

오늘(1일)로 대한민국의 인구가 5천만 명을 넘어섰다. 젊은 세대들이 다(多)출산을 기피하면서 고령화사회 걱정을 하고 있는 마당에 그나마 지난 30여 년 사이에 2천만 명이나 더 불어났으니 아직은 인구가 줄어져 나라가 사라지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인구 5천만 명 시대를 맞으면서 우리가 고민해 볼 것이 있다. 출산만 장려해 나가는 '많이 낳기'냐 아니면 국가와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여 젊은 세대들에게 '애 많이 낳아라'고 닦달하며 조바심 낼 것 없이 '잘 키우기'냐의 선택이다.

인구론(人口論)을 쓴 말 사스는 300여 년 전(1798년) 시대 안목에서 '한정된 식량 자원의 증가는 1'2'3'4'5식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1'2'4'8'16(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논리로 산아 제한과 조산(早産), 다산(多産) 억제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말 사스 이후 지난 300여 년간 실제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거나 25년 단위로 두 배(倍)가 된다는 추정 논리는 들어맞지 않았다. 우리 경우만 해도 1968년 3천만 명이던 인구가 32년이 지났는데도 2천만 명밖에 늘지 않았다. 전쟁, 천재지변, 질병, 사고, 출산 기피 등 환경의 영향이 있었다는 얘기다. 식량 자원 역시 농토 개간, 농업 기술의 진화, 식품 개발이 발전되면서 단순한 산술급수 이론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인구론이 비판받는 허점의 하나다.

그런 말 사스보다 2천여 년 앞서 인구 문제를 제기한 중국의 한비자(韓非子)는 '인구는 증가하지만 의식주의 자원(지구자연의 有限한 자원)은 소모돼 갈 뿐이어서 인간이 아무리 일해도 결국 자원 부족이 원인이 돼 전쟁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고 예언했다. 이라크, 이란 등 중동의 석유 전쟁이나 아프리카의 커피 분쟁, 북핵 갈등도 결국 먹고사는 자원의 결핍과 차등 분배에서 불거지는 분쟁으로 본다면 말 사스보다는 한비자의 인구론이 차라리 더 비슷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무턱대고 인구 수만 줄이면 잘 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자원만 더 창출해 내면 인구가 아무렇게나 불어나도 잘 살게 되는 것 역시 아니라는 해답을 제기한 이론이 또 있다. 다윈의 진화론이다. 먼저 한 예를 들어보자. 어느 곤충학자는 4월에 활동을 시작한 파리 한 쌍이 낳은 새끼들이 아무런 환경적 제약 없이 계속 번식한다면 8월쯤엔 191,010,000조(兆) 마리가 돼 지구 전체를 14m 두께로 덮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다윈의 주장처럼 '개체 번식이 모두 다 번식 기회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윈은 우리에게 한 가지 눈에 띄는 주장을 남겼다. 어차피 인구(개체)는 한정된 먹이와 자원을 초과해서 증가돼 경쟁할 수밖에 없지만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강한 형질(形質)을 지닌 개체(個體)들은 보다 많이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는 이른바 자연선택(自然選擇'Natural Selection)론이다. 허약한 형질의 개체를 1억 인구로 불리는 것보다 4천만이라도 경쟁력 있고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형질과 DNA를 갖춘 개체로 길러주고 강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다.

비즈니스위크지(紙)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10위에 든 나라들도 캐나다(인구 3천300만)를 빼고는 1위 덴마크(550만)와 2위 스위스(750만), 3위 오스트리아(820만), 4위 아이슬란드(30만) 등 모두 다 소인구(小人口) 국가들이다. 인구 수와 행복이 꼭 비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머릿수보다는 경직되지 않은 사회 분위기, 수준 높은 의식과 공교육, 좌'우파 다툼이 없는 사회 안정 등 질 좋은 개체 형질을 강점으로 지녔다.

다투고 분열된 이기적 형질의 사회 구조로는 인구가 1억 명이 된들 다윈의 말처럼 강하게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 국가가 될 수 없다. 좋은 형질과 품성을 키우는 단합 대신 밤낮 찢겨져 이념과 빈부의 갈등만 키우고 있는 우리가 인구 5천만 명 시대에 선택해야 할 길은 '많이 낳기'에 앞서 '잘 키우기', 다시 말해 정치, 교육, 문화, 건강, 환경 등 국가 인프라와 의식의 대혁신이다.

김 정 길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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