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책읽기]추방과 탈주/고병권 /그린비

입력 2010-01-28 13:54:49

국가로부터 추방당했다는 느낌만큼 대중은 적극적 탈주

그들은 참 열심히 공부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학문공동체라 부른다.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그들이다. 수유+너머를 이끄는 추장 고병권의 책은 그래서 남다르다. 깨어 있으려는 의지와 지식을 대중과 나누려는 열정이 뜨겁다.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천리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공부하기도 한다. 매일 걷고 밤마다 지역 농민과 교사, 주민들을 만나 세미나를 연다.

길 위에서 그들은 새만금의 갯벌,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기반을 내놓게 된 농민들, 비정규 노동자들, 예술가들, 국가안보라는 이유로 자신의 대지를 잃은 평택 대추리의 주민들, 그리고 단지 시민이 되기 위해서 생명을 걸어야 하는 장애인들, 노동만을 제공할 수 있을 뿐 어떤 권리도 가질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 이 모든 소수자들에게서 한계지대로 밀려난 주변의 삶이 당면한 위기를 목도한다. 이들이 바로 우리 대다수의 모습임을 직시한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휩쓸면서 한국 사회 대중 다수가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일부'의 형상을 취하게 되었고, '주변'이라는 예외적이고 부차적인 공간이 정상적이고 핵심적인 공간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서 저자는 법에 의해 방치된 삶만 있는 게 아니라, 법 바깥으로 탈주하는 삶도 존재함을, 국가의 추방이 야기한 대중의 탈주를 목격한다. 대중은 국가로부터 추방당하는 만큼이나 적극적으로 탈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는 불안에 대해서도 말한다. 불안은 삶의 안정된 구조가 해체되고, 위기가 영속적임을 실감하면서 생겨난 정서이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감정, 마치 자기 나라 안에서 정부를 잃어버린 난민이 된 것 같은 감정이기도 하다.

지난 십여년간 대중들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소득의 상실, 고용의 상실을 의미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거기에는 삶의 안전보장 상실이 있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불안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전환기의 비용이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 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조정이 영속화된 사회, 영속적인 불안정을 겪어야 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와 노숙인, 탈성매매 여성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들에게 인문학 강좌가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인문학을 100번 해도 삶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부유한지 여부에 상관없이 삶의 여유, 삶의 잠재성이 없는 사람이다. 삶의 절실함이나 긴급함은 무엇보다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강렬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고 있지만, 또한 잘 사는 법을 따로 배워야 할 정도로 사는 일에 서툴다. 생각하는 힘은 삶의 길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삶의 길을 창출하는 데 있다.

왜 우리 삶은 이토록 빈곤한가. 왜 우리 삶은 이토록 협소한 선택지만을 갖고 있는가. 아담의 죄와 벌은 그의 유치함 내지 어리석음이 지어낸 것이다. 이런 유치함, 어리석음이 그의 죄이고 그가 갇힌 감옥이다. 아담은 어리석음을 죄와 동일시했고 자기 삶의 파괴를 형벌과 동일시했다. 좋은 삶은 그 자체로 천국이고, 나쁜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들뢰즈는 어리석음을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평범한 것과 특이한 것의 항구적인 혼동"이라 불렀다. 어리석은 자는 삶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한 사람이다.

지식의 정원, 우정의 정원에 대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이제는 대중이 지식의 신체이고 대중이 지식을 생산하는 지성이다. 지식은 아카데미의 강단이 아니라 대중적 네트워크를 타고 소통되고 있다. 아카데미도, 지식인도 없지만, 가르치고 배우고 묻고 읽고 쓰는 일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주변화와 소수화, 불안시대의 삶과 정치, 지식의 운명, 인문학자와 현장 등 각 장마다 젊은 연구자의 치열한 사유와 고뇌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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