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문제를 담당하는 논설위원으로 지난해 11월 말 이후 두 달여 동안 40편 가까운 사설과 칼럼을 썼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종시 관련 글을 쓴 셈이다. 다양성이란 측면에선 문제가 있겠지만 세종시 수정으로 대구경북 미래가 산산조각 날 우려가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부족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지인 또는 독자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꼭 듣는 말이 있다. 대구경북 출신으로 서울에서 세종시 수정을 주도하는 인사들, 정부에 항의는 고사하고 지역 여론을 제대로 전달조차 못하는 자치단체장들과 국회의원들에게 따끔한 질책을 해달라는 주문이다.
이 같은 말을 들으며 떠오른 게 '춘향전'(春香傳)에 나오는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느냐는 뜻의 '수원수구'(誰怨誰咎) 사자성어다. 퇴기 월매의 딸인 춘향과 사랑을 나누던 이몽룡은 서울로 가 과거에 합격,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온다. 춘향이는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옥에 갇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처지다. 어사또의 신분을 감추느라 거지 꼴을 한 몽룡은 장모인 월매의 집을 찾는다. 걸인이 된 사위의 행색을 본 월매는 기가 막혀 하소연을 한다. "쏘아 놓은 살이 되고 엎질러진 물이 되어 수원수구를 할까마는 내 딸 춘향은 어쩔 것인가?"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수 없지만 춘향이의 처지를 돌아보니 어머니로서 가슴이 미어진 것이다.
세종시 수정을 강하게 밀어붙이거나 동조하는 수도권 인사들 중에는 대구경북 출신이 유달리 많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총리실 등 정부 부처는 물론 수정안 추진에 올인하는 친이계 국회의원들 중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인 것이다. 세종시 수정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전국지에 글을 써대는 교수'언론인 중에도 지역 출신이 수두룩하다.
대구경북에선 이들에게 고향을 사랑하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없다고 비판하고, 필자도 동의한 바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들을 원망할 이유가 없다. 수원수구인 것이다. 백년대계 또는 국가 효율을 위해 세종시 수정을 강행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에 공감해서가 결코 아니다. 이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에게 대구경북에 대한 배려와 애정을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판단에서다. 그런 생각을 한 우리가 너무 순진했다. 이 지역을 떠나 수도권에서 오래 살다 보면 대구경북에 대한 마인드와 애정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대구시장과 경북지사가 정부에 강하게 어필하지 못하는 데 대해서도 이들을 원망할 까닭이 없다. 몇 개월 앞으로 닥쳐온 지방선거 공천을 따내기 위해 목숨을 걸다시피하는 시장이나 지사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단체장으로 뽑은 우리의 잘못이 더 크다. 세종시로 인해 대구경북 성장의 싹이 잘릴지 모르는데도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는 이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침묵 또는 수정안에 찬성까지 하는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절반이 넘는 이들이 수도권에 자기 집이 있는 반면 대구경북에선 전'월세로 사는 의원들에게 지역에 대한 애정과 행동을 기대한 것 자체가 애초부터 무리였다. 철새들은 영원한 철새들일 뿐 텃새가 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더 이상 '그들'을 원망하고 탓하지 말자. 그런 사람들을 배출한 이 지역의 풍토에 문제가 있음을 자각하고 그런 사람들을 단체장이나 국회의원으로 뽑은 우리에게 책임을 묻자는 말이다. 앞으로는 고향을 핑계로 입신양명만 노리는 인사들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지역을 끝까지 챙기는 인사들에게 표를 주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 춘향이에겐 이몽룡이란 구원자가 있었지만 대구경북엔 이몽룡이 없다. 우리 손으로 대구경북을 벼랑 끝에서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6월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이 지역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행동력을 갖춘, 무엇보다 이 지역에 튼실하게 뿌리를 내린 인물을 선량(選良)으로 뽑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힘을 키우는 것만이 대구경북이 세종시는 물론 앞으로 닥쳐올 무수한 격랑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李大現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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