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드라이기

입력 2010-01-27 08:42:04

아파트 승강기 안에 며칠 전부터 쪽지 한 장이 붙어있다. 그 쪽지를 읽고 한참 동안 웃었다. 내용이 당차고 채색된 그림과 협박성 문구까지 있으니 읽어 내려가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쪽지를 붙인 사람은 바로 내 딸이다.

우리 집은 며칠 전부터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보름간 원룸을 빌려 살기로 되어 있어 큰 짐들을 미리 빼내고 몇 가지 필요한 물건만 거실 바닥에 남겨 두었었다. 내 노트북과 옷가지 그리고 딸이 쓰는 드라이기와 인형 등이었다. 이것들은 저녁에 원룸으로 옮기기로 하고 아파트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출근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맨 앞쪽에 두었던 드라이기가 없어졌다. 누군가가 들어와서 슬쩍 가져간 모양이다. 딸은 펄쩍 뛰며 난리였다. 겨우 딸을 달래놓고 이웃집에 차를 마시러 갔다. 이런 저런 수다에 빠지다 보니 삼경의 끄트머리가 되었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드라이기 가져간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다. 한밤중에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집으로 얼른 달려왔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딸이 참으로 야무지다. 경비실로 가서 분실한 물건과 경위를 말하고 늦은 시간까지 CCTV를 확인한 것이다. 분실물이 작아 곤란해 하는 경비 아저씨를 '딩딩 딩딩 사건 25시 아시죠?'까지 들먹여 두 손 들게 했고, 흐릿한 화면 속의 사람을 일일이 살펴 드라이기를 들고 통로로 나간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당장 찾아오자는 딸의 말에 세상일이 자신의 기분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타일렀다.

딸은 잃어버린 드라이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범인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더 억울한 모양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딸이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어제 오후 3시에서 6시 사이 리모델링하는 집에 들어오셔서 드라이기 가져가신 분, 꼭 좀 돌려 주셈. 어른이 쓰는 것 아님. 학생이 쓰는 것임. 제가 아침마다 머리를 감고 말려 묶어야 하는데 머리숱이 많아서 드라이기가 없으면 산발하고 학교에 가야함. 그 드라이기는 미용실에서 사용하는 분홍색 초특급임. 마지막으로 이 말은 안하고 싶었지만 CCTV 다 봤음."

매일 공사 현장을 점검하러 집에 오면서 쪽지를 본다. 상세하게 그려진 드라이기 그림에서 기다림에 애타는 딸의 순수한 마음이 보인다. 딸에게는 이번 일이 앞으로 겪게 될 사회 생활의 한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걸림돌을 걷어차고 길을 가는 것보다 그것을 밟아 디딤돌로 만들 줄 아는 지혜를 먼저 터득했으면 싶다.

주인석(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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