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진객 생명의 날갯짓, 철새들의 고공 쇼
새의 뼛속은 텅 비어 있다. 깃털속도 비었다. 뱃속에 소변을 저장하는 방광은 애초부터 없었다. 새들은, 그들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동물로 진화하기 위한 노력을 지금 이 순간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새들 중 큰뒷부리도요새는 뉴질랜드에서 중국까지 1만300㎞를 난다. 또 알래스카에서 월동지인 뉴질랜드까지 1만1천700㎞를 논스톱으로 날아가기도 한다. 저들 새들이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건 비행을 감행하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멀리 시베리아, 몽골, 북중국 등지에서 진객들이 찾아와 겨울을 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대지 위, 인간 저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겠는가. 겨울 탐조의 계절, 인간과 더불어 사는 날짐승들의 세계도 한번쯤 기웃거려보면 어떨까? 영남생태보존회가 진행하는 '새박사 류시현과 함께하는 낙동강 철새 탐사'팀을 따라 고령 개진, 우포늪, 주남저수지로 겨울철새를 만나러 간다.
◆고령 개진-독수리
수리류의 새들은 맹금류다. 맹금류는 먹이사슬 하위계층에 있는 날짐승과 길짐승을 먹이로 삼는다. 수리류 중에서도 특히 독수리는 사납게 생긴 모양새나 엄청난 크기에서 어린아이도 채어가는 공포의 새로 각인되어 있다.
동물원에서나 있을 법한 무시무시한 독수리들이 멀리 북중국과 몽골로부터 날아와 고령에서 겨울을 나고 있어 찾아 나선 길. 영남생태보존회 정제영 사무국장은 이미 선발대가 고령으로 가서 독수리를 붙잡아 놓고 있으니 독수리를 꼭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수천㎞를 날아온 독수리가 '날 보러 오슈'하고 한 곳에 앉았을 리 만무한데 과연 볼 수나 있을지….
탐사대는 마음이 급하다.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수차례 선발대와 통화하고 독수리 무리를 뒤쫓았다. 이곳 독수리의 생태를 보면 보통 오전 10시가 지나면 땅에 내려앉지 않고 공중에서 바람을 타기 때문에 관찰하기 힘들다고 한다. 40여분을 헤매던 차가 고령군 개진면 낙동강 강둑 너머 들판 한가운데 멈췄다. 선발대가 가리키는 곳을 쌍안경으로 확인하니 날개가 1m50㎝는 됨직한 독수리 24마리가 갈아엎은 들판 가운데 웅크린 채 모였다.
"흔히 독수리는 사나운 새로 알고 계시죠. 그러나 실제 독수리는 전혀 사납지 않고 겁이 많은 새입니다. 독수리는 스스로 사냥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주로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이로 삼습니다. 독수리들이 하필 고령 개진 쪽에 무리지어 모여드는 것도 감자밭에 낼 겨울 두엄더미에 간혹 동물 사체들이 섞였으니까 그걸 먹으려 몰려드는 것으로 보입니다"는 게 동행한 류시현(경북대 생물교육과 연구원) 박사의 설명이다.
독수리들은 탐사대가 100m 근처까지 접근해도 아랑곳없이 저 혼자 깃털을 다듬고 중간중간 섞여 앉은 까마귀와 장난질했다. 늘어뜨린 날갯죽지가 땅에 끌 정도로 큰 덩치이지만 이들은 아직 한 두살배기 어린새들이다. 고령을 찾은 독수리들은 성조(成鳥)의 무리들과 먹이다툼에서 밀려 남으로남으로 내려오다가 끝내 이곳까지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
10시 반쯤이 되자 우두머리격인 독수리가 먼저 힘차게 날아오르자 뒤이어 무리들이 땅을 차고 올라 찬바람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들 중 더러는 긴 여정에 입은 상흔인지 날개깃 일부가 빠졌다. 그렇지만 그들은 유유자적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맹금류의 날갯짓 그대로 손가락을 편 듯 날개 끝을 쫙 펼친 채. 100점 만점에 100점인 명연출.
◆창녕 우포늪-고방오리, 쇠오리
우포늪의 겨울은 갈색과 흰색이다. 늪지의 갈대와 수생식물들은 모두 말라 갈색이고 늪의 수면은 얼어붙어 흰색으로 적요 속에 잠겨있다.
보통 늪지 생태탐사와 달리 우포늪 뒤쪽을 돌아 목포 쪽으로 접근해 들어간다. 얼음이 녹은 늪 가장자리 한 켠에는 덩치 큰기러기와 쇠오리, 청둥오리 따위가 무리지어 물 위에 떠있다. 고니는 큰 덩치에 걸맞게 사람들을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느긋하게 물 위를 유영하고 자맥질하기도 한다.
목포에서 사지포 뚝 쪽으로 한참 진입해 들어가자 더 많은 개체의 오리류들이 물 위를 떠다니고, 인기척에 놀란 물닭 세 마리가 갈대밭 속에 있다가 늪 건너편으로 후다닥 자리를 옮긴다. 얼음판 위의 오리들은 뒤뚱거리며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목청 높여 꽥꽥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왜 보이는 새들은 모두 오리 종류뿐일까? 우리나라 겨울 철새 중 개체가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오리류. 그러면서도 이들은 산간에 흩어져 숨어있는 산새와 달리 물이 있는 곳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죄다 오리들만 보일 수밖에. 그런 특성 때문에 오히려 겨울 탐조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새들 입장에서는 그들이 늪이나 저수지 등 특별히 한곳에 모여야 할 이유는 또 있다. 멀리 시베리아, 몽골, 북중국에서 흩어져 살다가 겨울을 지낼 곳을 찾아 우포늪으로 날아든 철새들에게는 이때가 맞선을 보고 짝을 찾아 교미를 하기 위한 다시 없는 기회. 이 때문에 수컷들은 암컷의 관심을 끌기 위해 종일토록 기름샘의 기름을 부리로 찍어 바르며 깃털을 가다듬는다. 암컷들은 마음에 드는 짝을 찾아 흘깃거리고 노골적으로 접근도 해보는데, 어쩌다 삼각관계라도 생기면 서로 치고 받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 이렇듯 오리들이 아름다운 추억만들기를 하는 동안 우포늪의 겨울은 깊어만 간다.
◆주남저수지-고니
주남저수지는 우리나라 겨울철새 탐조 1번지이다. 나들이객, 탐조객, 촬영꾼들이 뒤섞이고 차량들이 북새통을 이룬 주남저수지는 동물원 새장 앞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인간들이야 아우성을 치든 말든 멀찌감치 저수지 복판 모래톱에 모여 겨울햇살을 즐기는 고니, 재두루미, 혹부리오리, 큰기러기들이 오히려 고맙다.
덩치가 큰 고니들은 더러는 물 위에 고요히 떠있기도 하고 더러는 외발로 선 채 고개를 날갯죽지 밑에 박고 미동도 않는다. 외발로 선 고니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고 편안한 자세로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것. 자세히 보면 고니들은 눈과 같은 순백의 깃털을 한 녀석들이 있는 반면 약간 연분홍빛이 도는 깃털에 노숙자 타입의 녀석이 있다. 이들 중 순백의 고니는 이미 다 자란 성조이고 지저분한 고니들은 아직 어린 유조들이다.
모래톱 옆, 얼음 위에 꼼짝 않고 재두루미들이 서있다.
"쟤네들은 어떻게 동상도 걸리지 않고 얼어 죽지도 않을까?" 지난해에는 강원도 철원까지 탐조여행을 다녀왔다는 이동현(구미 정수초등 6년)군은 궁금하다.
겨울 새들은 체내 지방질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맘쯤에는 손으로 만졌을 때 살갗에 닿지 않을 정도의 두툼한 깃털이 살갗을 싸고 있기 때문에 추위를 잘 견딘다고. 또 새는 발의 비늘이 두껍고 피돌기가 빨라 동상에 걸리는 일이 없다고 탐사팀을 이끄는 새박사는 알려줬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저수지 반대편에 있던 한 무리 큰기러기들이 대열을 이루고 급하게 날아간다. 낮 동안 쉬다가 추운 밤을 보내기 위해 저녁 땟거리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저들은 멀리 날아 넓적부리를 얼어붙은 논바닥에 박고, 온몸을 밀며 곡식 낟알을 찾을 것이다. 새들도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몸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가 보다.
포유동물인 인간이 난생동물인 새를 더 이상 이해하기는 버겁다. 그렇지만 오늘, 대지 위를 인간 혼자 삭막하게 사는 것보다 날짐승 길짐승들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것은 알겠다. 독수리, 오리, 고니가 그것을 가르쳐줬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