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마재기

입력 2010-01-21 14:46:28

무채와 함께 무친 마재기 '밥 도둑'

해초(海草)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니 갑자기 '하늘을 나는 돛단배'(이성락 저)란 소설 속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어쩌면 어릴 적 우리 집 이야기를 쓴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진다.

"어머니가 식구들의 허기를 메우기 위해 준비한 먹을거리가 하나 있었다. 가사리 버무리였다. 바닷물이 약간만 빠져도 갯바위의 가사리 밭은 금방 뻘건 바탕을 드러내었다. 그 가사리에다 밀가루를 뿌려 버무린 것이 바로 가사리 버무리였다. 뻑뻑한 고놈을 몇 움큼 집어서 입 안에 우겨 넣고 나면 한 나절 내내 가슴이 몹시 쓰렸다."

##겨울철 자주 먹던 해초

겨울철에 자주 먹었던 해초의 일종인 '마재기'를 우리는 '똑똑자반'이라 불렀다. 동해 어촌에선 이를 '진저리'라 부른다. 마재기도 진저리도 우리말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바다풀 하나의 어원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미국사람들은 바다 속 해초들의 이름을 어떻게 붙이고 있을까. 미역(brown seaweed) 김(laver) 다시마(tangle) 파래(green laver) 정도가 사전에 나와 있을 뿐 나머지는 그냥 해초(seaweed)로 통칭되고 있다.

우리는 해초의 생김새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미역 김 파래 외에도 싱기이 마재기 메셍이 톳 고시래기 산호초 까막사리 불등가사리 세모가사리 진두발 갈래곰보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해초 중에서도 특히 마재기를 좋아한다. 마재기는 음력설을 전후한 한겨울철에만 먹는 것이다. 요즘처럼 눈이 많이 내리고 강추위가 계속될 때 마재기는 잃어버린 입맛까지 되돌려 주는 산뜻하고 매력 있는 음식이다. 음력설 전에는 물 마재기를, 설 쇤 후에는 마른 마재기를 먹는다.

마재기와 궁합이 맞는 것은 무다. 마재기를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뺀 다음 무를 약간 굵게 채쳐서 갖은 양념을 한다. 마늘은 많이 넣고 고춧가루도 조금, 참기름은 아낄 게 없다. 무채를 무칠 땐 맛있는 액젓으로 간을 하면 맛이 한결 담백하다. 쑹덩쑹덩 자른 마재기를 무채와 함께 손맛 나는 맨손으로 무쳐내면 그게 바로 밥 도둑놈이다.

마재기는 김치밥국을 끓일 때 넣어도 좋고, 김장하다 남은 청각을 마재기와 함께 넣고 국을 끓이면 그 맛 또한 같이 먹던 사람이 여럿 숨을 거둬도 모를 일이다. 시원하고 감칠맛이 있어 평소 말 없는 시아버지도 "야야, 국물 좀 남은 게 없냐"고 앙코르를 청하는 그런 음식이다.

초등학교 사 학년 때, 음력설이 가까운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목욕 준비를 부지런히 하시더니 빨리 앞장서라고 채근하셨다. 그때 우리 동네에는 목욕탕이 없었다. 해마다 명절 전에는 큰 서 말들이 솥에 물을 데워 부엌 바닥에서 묵은 때를 미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날은 의외였다. 학교 청부에게 손을 써 장작 값만 주고 목욕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대형 철모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목욕통에 앉은뱅이 스케이트처럼 생긴 발판이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걸 밟고 한 쪽 발을 담갔더니 얼마나 뜨거운지 "믿을 놈 한 놈도 없네"란 유머가 생각날 정도였다. 온몸이 빨갛게 익도록 때를 벗기고 나서야 겨우 놓여 날 수 있었다.

##갱죽 끓여 먹으면 시원한 맛

목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목욕통처럼 생긴 큰 솥에 마재기를 넣고 갱죽을 끓여 양재기에 담아 주셨다. "실컷 먹어라. 목욕하고 나면 배가 고프단다. 우예, 더 먹을래." 마재기를 나물로 무쳐 먹자니 양이 모자라 갱죽을 끓여 양을 늘리는 꾀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마재기만 생각하면 고향생각이 난다. 어제는 모처럼 내리는 눈길을 걸어 마재기를 맛있게 무쳐 내는 소문나지 않은 잡탕 전문 식당엘 갔다. 참소주 한 병을 시켜 마재기 무침을 먹는 동안 어머니가 어른거려 마렵지도 않은 소피를 보러 괜히 변소를 들락거렸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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