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恥百年] ④계몽운동의 양날

입력 2010-01-18 07:47:28

국권회복운동 밑거름은 성과, 일제침략에 이용은 한계

1907년 안동에 설립된 협동학교는 신교육의 요람이었지만 유림과 의병의 반대와 일제의 탄압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안동 협동학교의 제 1회 졸업식 모습.
1907년 안동에 설립된 협동학교는 신교육의 요람이었지만 유림과 의병의 반대와 일제의 탄압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안동 협동학교의 제 1회 졸업식 모습.
협동학교의 주축은 안동의 유지들과 신민회에서 파견된 교사들이었다. 사진은 협동학교의 교사들.
협동학교의 주축은 안동의 유지들과 신민회에서 파견된 교사들이었다. 사진은 협동학교의 교사들.
이상룡(左) 류인식(中) 김동삼(右)
이상룡(左) 류인식(中) 김동삼(右)
권대웅 대경대 교수
권대웅 대경대 교수

"조선인은 총독정치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길밖에 없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말이다. 당시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탄하는 과정에서 매수와 협박이 난무하였다. 이른바 친일화 공작이었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시작한 친일화 공작은 1910년 병탄 전후 더욱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일제는 강제병탄 한 달 뒤인 9월 29일 대한제국의 관리와 귀족, 양반과 노인들에게 은사금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또 10월 7일 조선귀족령을 발표하여 76명에게 작위를 주었다. 일제 병탄에 동조한 세력들은 은사금과 작위를 받았다. 그들의 축하연은 연일 계속되었다. 반면 우국지사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일제의 강제병탄과 통치를 거부하였다. 이들에게는 체포·투옥·처형 등의 협박과 위협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결·순국하거나 새로운 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하였다.

대한제국기 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단체는 대한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서북학회·호남학회·교남교육회 등이다. 계몽운동단체는 근대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근대적인 민족교육과 민족문화의 향상, 민족자본의 육성과 민족군대의 양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계몽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운동이었고, 민족의 역량을 배양하기 위한 실력양성운동이었다.

일제는 한국 강제병탄과 함께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포함하여 모든 단체들을 해산시켰다. 계몽운동 단체들도 1910년 8월 25일 '보안법(保安法)'(1907.7)에 의해 일제히 해산됐다. 곧이어 신민회는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1907년 창건한 신민회는 대표적인 계몽운동단체였다. 신교육운동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비롯한 많은 사립학교를 세웠으며, 산업진흥운동으로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였다. 또 신교육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안동의 협동학교는 신민회가 전개한 신교육구국운동의 대표적인 결실이었다.

안동의 협동학교는 1907년 봄에 설립되었다. 1906년 3월 광무황제의 '흥학조칙'(興學詔勅)과 경북관찰사 신태휴의 '흥학훈령'(興學訓令)이 발표되면서 영남지방에도 곳곳에 신식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때 안동의 류인식·김후병·하중환 등이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인가를 신청하였다. 안동군의 동쪽 7개면이 힘을 합쳐 설립한다는 뜻에서 '협동'(協東)이라고 하였다.

협동학교의 재원은 호계서원의 재산과 의성 김씨 문중을 비롯한 여러 문중에서 기부하였다. 내앞마을의 가산서당을 학교 건물로 삼았다. 그리고 김대락은 학교 운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교사는 김동삼·류인식 등 안동의 유지들과 이관직·김기수·안상덕 등 신민회에서 파견된 인사들이었다. 교육이념은 국민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했다. 이것은 신민회의 교육이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협동학교는 운영 과정에서 보수적인 유림의 반대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10년 7월 예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최성천 휘하의 의병들이 협동학교를 습격하였다. 이때 신민회에서 파견된 교감 김기수와 교사 안상덕, 그리고 안동출신 서기 이종화가 살해되고 말았다. 의병들은 학생들의 단발과 신교육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안동지역에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인사들은 서간도로 망명하기 시작하였다. 협동학교를 이끌던 김동삼과 류인식, 대한협회를 주도하던 이상룡 등이었다. 이들의 망명은 신민회 회원들의 서간도 망명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1910년 초부터 신민회는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종래의 실력양성운동이 더 이상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신민회 회원 양기탁·신채호·장도빈 등이 앞장섰다.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에 걸쳐 이회영·이시영·이석영 형제들과 이동녕·이상룡·김창환·주진수 등 7세대가 서간도 이주를 시작했다. 서간도에 이주한 신민회 간부들은 1911년 봄 유하현 삼원보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이 무관학교는 국외 독립군기지 창설의 시작이었다.

이와 같이 신민회의 계몽운동은 실력양성운동으로 시작되어 국외 독립운동기지건설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렇지만 계몽운동 단체들의 국권회복운동은 일제의 한국침략에 철저히 이용되었다. 이것은 정치권력, 혹은 관료 지향적이었던 계몽운동 참여 인사들의 성향 때문이었다. 대한제국기 계몽운동이 전개되던 과정에서 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북학회·호남학회·교남교육회 등의 일부 회원들은 관직으로 나갔다. 그리고 1910년 일제의 강제병탄 이후 계몽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친일 인사들은 일제의 관리가 되어 식민지 통치기구의 하부조직으로 재편성되었다.

일제강점기 유행하던 풍자로 문관은 '군서기'(郡書記), 무관은 기껏해야 '순사보'(巡査補)라 했다. 일제는 한국인을 결코 고위관리에 임명치 않았다. 조선총독부에서 고위관리인 고등관은 겨우 10~15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 말단 행정의 실무자와 수탈의 하수인으로 참여하였다. 이것은 예견된 것이었다.

대한제국기 계몽운동은 많은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계몽운동은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이용되고, 계몽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인사들은 일제와 타협했다. 그럼에도 계몽운동은 일제강점기 한국독립운동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국권약탈의 위기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데 기여하면서 민족운동에 올바른 이념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권대웅·대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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