댁유통역사 새로 쓴 정직·신용의 한평생
대구백화점의 창업주 고(故) 향산(香山) 구본흥(具本興·1920~2006) 명예회장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회고록 '고객과 함께 한 60년의 삶'은 주위 사람들의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구본흥 명예회장의 인생과 대구백화점의 역사를 기록했다. 과장이나 미화를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고 애썼다.
구본흥 명예회장은 속칭 납실이라 불리는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호리에서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시절 장남들이 그랬듯 그는 부모를 모시고 집안과 고향을 지키며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었다. 농사에 매달리던 그는 18세 때 칠곡군 가산면 학산리 권동환씨의 장녀 권수년(2006년 작고) 여사와 혼인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장인과 부인은 "성공하려면 대구로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회장은 21세 때인 1941년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 대구상회를 열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 가게 주변을 청소했다. 청소를 끝낼 무렵이 돼야 통행인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한번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 성실과 신용이 알려지면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그 무렵 대구에서 '유복상회'를 운영하고 있던 전유복 사장이 그를 불렀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내게 딸자식이 있는데 사위가 징용 가서 소식이 없어요. 이 큰 상회를 딸에게 물려 줄 수도 없고…. 내가 2년 동안 구 사장을 지켜봤어요. 구 사장이라면 '유복상회'를 번성시켜 대구에 뭔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구본흥 명예회장은 좋은 조건에 유복상회를 인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좋은 조건이라고 해도 인수 대금이 160만원이나 됐다. 당시로는 거금이었다. 그로서는 담보로 쓸 게 없었다. 그때 인수 대금을 빌려준 사람은 구 명예회장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담보로 잡았다. 유복상회를 인수한 구 명예회장은 1944년 1월 10일 동성로의 유복상회에 '대구백화점'이란 간판을 걸었다. 대구백화점의 출발이었다.구 회장은 1969년 동성로에 지하 1층, 지상 10층의 대구백화점을 신축했다. 백화점으로는 당시 한강 이남에서 최대 규모였다. 바겐세일과 신용카드 발행, 친절교육 등을 통해 회사를 키웠다. 1969년 12월 16일 대구백화점 신축 개점 당시 매일신문에 실린 광고는 '유통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는 문구였다.
'모범적인 정찰제로 염가봉사, 상냥하고 부드러운 서비스, 쾌적하고 따사로운 난방시설, 쉬임없이 봉사하는 엘리베이터.'
이 문구는 백화점 개점을 알리는 내용인 동시에 전통시장과 다른 백화점의 출현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정찰제, 서비스, 쾌적한 난방시설, 엘리베이터 등은 당시 전통시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소였다. 회고록에는 구 명예회장의 소년 시절부터 1944년 대구상회로 유통의 불모지인 대구에서 주식회사 대구백화점을 설립한 일, 1984년 3월 유통업계 최초의 은탑산업훈장 수상,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대백선교문화재단 설립, 당시 한강 이남 최대 규모의 대백프라자 오픈 등 대구백화점의 역사와 구본흥 명예회장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다양한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307쪽.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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