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덮인 들판·살얼음 낀 강변과 함께가는 낭만여행
연인들은 꿈을 꾼다. 얼어붙은 동토를 달리는 기차,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눈밭을 달리는 꿈을. 때로 코트자락을 나눠 덮고 곤한 잠에 빠져도 좋고, 석양빛에 젖는 대지를 혼곤히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비록 백설의 평원, 눈 덮인 자작나무가 열병식을 하는 시베리아의 숲은 아닐지라도 기차여행의 갈증을 풀어줄 만한 여정이 있다. 경북도와 코레일 대구지사가 운영하는 경북관광순환열차. 김 서린 차창을 통해 바라보는 여행길에는 빈 들판에 몰려다니는 바람과 살얼음 잡힌 강변이 함께한다.
경북관광순환열차는 경부선 동대구역에서 출발, 김천에서 방향을 꺾어 경북선에 얹은 후 영주에 다다라 다시 중앙선을 타고 동대구역 출발지 제자리로 돌아오는 코스다. 비록 동행자가 사랑스런 그 사람이 아니라 친구라도 어떠랴. 김밥에 귤, 삶은 계란 따위의 주전부리를 챙겨 5시간 50분간의 낭만여행을 떠난다.
◆AM 8:48 출발
경북관광순환열차는 오전 8시 48분 동대구역을 출발, 오후 2시 38분에 도착하는 오전편과 오후 3시 40분에 출발, 오후 9시 19분에 도착하는 오후편 두 차례가 있다.
오전 8시 40분. 동대구역 1번 플랫폼에는 현란하게 안팎 치장을 한 관광열차가 따끈따끈 몸을 덥히며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총 4량을 이은 관광열차 전동차 4호차에 오르는 순간, 화려한 스크린 프린팅과 풍선이 매달린 실내 광경에 축제의 장에 들어섰음을 느낄 수 있다.
8시 48분. 중년 여성 5명이 단체석에 자리를 잡고 노년의 부부와 젊은이 너덧명을 태운 열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 의자를 순방향으로 돌려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찰나, 열차는 대구역에 멎는다. 대구역에서는 중년의 계꾼을 포함한 열댓명이 먹을거리 박스를 들고 오른다.
기차는 1분 남짓 멈춘 후 곧장 역 구내를 빠져나와 경부선 철로 위를 시속 110㎞ 정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차가 왜관역을 지날 즈음 중년의 계꾼이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케이크를 놓고 생일 축하송을 부른다. 열차 안의 모든 승객들이 기꺼이 박수로 축하해주고, 생일을 맞은 여성은 일일이 케이크와 샴페인을 돌린다. 낯선 승객들끼리 금방 한데 어우러져 즐거운 파티가 벌어졌다.
웃고 떠들며 케이크를 먹는 사이 승무원이 2호차 미니카페에서 청도 와인 시음회를 한다며 한잔 해볼 것을 권했다. 또 승객 가운데 미처 점심식사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점심도시락을 주문받기도 했다.
잠시 자리를 옮겨 3호차로 가는 도중, 8명이 앉을 수 있는 '신라방'이란 단체 칸에서는 5명의 중년 여성들이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3호차는 단체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꾸며진 이벤트 칸. 차량 중앙에 좌석 대신 노래방 기기를 설치하고 나지막한 무대까지 꾸며놓았다. 아직 아침 시간이어서인지 이벤트 칸에는 탑승객이 아무도 없고 노래방 기계에서 경음악이 저 혼자 흥겹다.
3호차 한쪽 끝에는 경상북도 각 시군 홍보자료를 비치하고 곳곳에서 생산된 특산품 35종을 전시해놓고 있다. 각종 음료와 차, 건강식품이 대부분으로 열차 내에서 직접 판매하지는 않는다.
2호차 후미에 마련된 스낵코너에는 빨간색의 다섯 개 간이의자가 창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놓여있고 앙증맞은 미니바가 설치되어 있다. 승무원은 이곳에서 청도 감와인을 한병 열어 승객들에게 시음용으로 돌렸다.
2호차와 1호차는 일반승객들이 이용하는 칸. 순환열차 전 구간을 이용하지 않고 일부 구간을 이용하는 청춘 남녀들이 나란히 앉아 기차여행의 낭만을 즐기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일터로 가는 사람, 기숙사에서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절집을 찾아가는 참배객들이 차창 밖에 눈을 돌린 채 겨울 풍경에 젖어 있다.
◇경부→경북선
열차는 김천역에 도착해 잠시 정차한 후 경부선 철길에서 경북선으로 선로를 바꿔 내달렸다. 경부선의 회색 도시 풍경과는 달리 경북선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겨울 산하와 들판풍경이 자주 스쳐 지나가 비로소 마음이 느긋해진다. 상주역을 향해 달리는 중간 간이역 옥산역에서 열차는 잠시 정차했다. 무료하던 역장은 쌀쌀한 날씨에도 반갑게 플랫폼으로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열차는 상주, 점촌을 지나는 동안 담장과 담장 사이 좁은 골목길을 달리고 마당 끝 공터를 지나치면서 60, 70㎞로 천천히 비켜나간다. 더러 억새가 우거진 좁은 내를 건너기도 하고 산모롱이를 돌아나가기도 한다.
◆PM 12:00 최고 경관코스
열차가 예천역을 지나면서부터는 산기슭을 돌아 내성천을 끼고 달린다. 20여분간 계속되는 이 구간은 관광순환열차가 최고 경관지역으로 손꼽는 코스. 강가 모래밭에는 아무도 지나지 않은 백설이 그대로이고 살얼음 잡힌 강물은 흐름이 끊긴 듯 유장하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솔숲을 흔들어 잔설을 날리고 눈바람은 골짜기를 타고 넘어간다.
영주를 앞두고 조용하던 열차 안이 갑자기 부산스럽다. 낮 12시가 다가오면서 옆자리 승객이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 펼치며 같이 식사할 것을 권한다. 12시 5분 영주역에 도착하자 주문한 도시락이 배달되었다. 도시락을 들고 간이 탁자가 있는 단체 칸 '신라방'으로 옮기자 단체예약으로 먼저 자리 잡은 중년 여성들이 자리를 내주며 따끈한 물과 밑반찬을 덜어서 건네준다. 이들은 한 동네 이웃 사이. 틈 나는 대로 같이 여행을 즐긴다고 한다. 일행 중 권애자(64)씨는 "주중에도 버스를 연계한 북부권 테마여행이 가능한 줄 알고 먹을거리를 챙기고 옷도 등산복으로 중무장해서 왔는데 인원이 모자라 못한다고 해서 실망"이라면서 "그래도 오랜만에 기차여행을 하니 어릴 적 추억도 떠오르고 창밖의 풍경도 즐길 수 있어 좋다"고 했다.
◆PM 2:38 귀로
도시락을 먹고 과일을 나눠 먹는 동안 열차는 중앙선으로 선로를 바꿔 귀로에 올랐다. 열차가 안동을 지나 의성을 향하는 동안 식곤증에 노곤해진 승객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몇몇 승객은 노래방 칸으로 자리를 옮겨 몸을 흔들며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쉼없이 달린 열차가 북영천을 앞두고 있을 즈음 아쉬움에 단체승객 일행 가운데서 "영천에 내려 좀 더 놀다가 가자"는 소리가 터져 나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끝내 열차에서 내리지 못한 채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종착지인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일행의 얼굴에는 아쉬움의 표정이 역력했다.
오후 2시 38분. 밖은 아직 한낮. 열차는 5시간 50분 동안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서서히 동대구역으로 들어선다. 승객들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플랫폼을 내려섰다. 승객 중 누군가가 말했다. "이번은 맛보기야, 다음번 주말에 다시 한번 오자고…." 여행문의 053)940-2223.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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