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촌 금호강 스케이트장엔 호떡·고갈비…없는 것 없어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산과 강이 꽁꽁 얼어붙어야 한다. 그래야 겨울 맛이 난다. 옛날 동촌의 금호강은 스케이트장이었다. 얼음판은 스케이터들로 붐볐고 링 주변에는 온갖 장사꾼들이 호황 속에 손놀림이 재발랐다. 호떡 오뎅 국화빵 고갈비 등 없는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따끈따끈한 호떡 난전으로 몰렸지만 어른들은 시린 발을 동동 굴려가며 막걸리나 소주를 시켜 놓고 고갈비(고등어 통구이)를 뜯었다.
대학 일학년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KKM이란 일본제 칼날을 70원에 구입하여 밑창이 빳빳한 복싱화에 붙여 근사한 스케이트를 만들었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비까번쩍하는 스케이트를 어깨에 걸치고 다녔다. 친구들이 부러운 눈치로 쳐다보며 얼음지치러 갈 때 끼워달라며 과분한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친구끼리 한 스케이트 번갈아 타
스케이팅을 하러 못이나 강으로 나갈 땐 친구 서넛과 함께 나간다. 한 사람이 두세 바퀴를 돌고 난 후 순서를 다음 친구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다 보니 몇 번 타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렇게 되면 연속 근무로 피곤에 지친 스케이트는 날이 상하고 친구들은 소원대로 오래 탈 수가 없어 맘만 상했다. 상한 날은 칼갈이 전문가에게 맡겨 날을 세워야 한다. 날이 무디어진 칼날은 쉽게 미끄러져 탈 수가 없게 된다.
칼날은 동촌 금호강으로 나가야 벼를 수 있었다. 날을 세우는 데는 돈이 들었다. 고향인 하양에서 동촌까지 왕복 차비와 칼날을 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할 수 없이 숫돌에 날을 대충 문질러 얼음판으로 달려 나갔지만 무딘 날은 거울 같은 얼음판에서 미끄러지기만 했다.
하루는 친구 두엇이 찾아와 하도 졸라대기에 날 없는 스케이트를 둘러매고 뒷골 못으로 갔다. 하양 성당에서 교동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있는 이 못은 얼음의 표면에 너테가 많이 끼여 있어서 칼날이 예리하지 않아도 얼음을 지칠 만했다.
스케이트의 주인인 내가 먼저 타기로 하고 두 바퀴째 돌 때 사고가 나고 말았다. 속도가 붙었는데 회전을 하기 위해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뒤에 붙이면서 턴 동작을 취했다. 그런데 칼날이 무뎌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왼쪽 어깨를 얼음판에 심하게 부딪친 것이다. 하늘이 노래지면서 전신에 힘이 쭉 빠져 나갔다. 빙판에 넘어져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친구들은 서로 자기 차례라며 스케이트를 벗기기에 바빴다.
쇄골이 부러진 것이다. 읍네 장터에 있는 회생의원엘 갔더니 "삼 주 동안 꼼짝하지 말라"며 조끼 모양의 깁스를 해 주었다. 집에 가면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극진한 간호를 해 주셨다. 뼈에 좋다는 소뼈 곰탕을 끓여 주었으며 요를 두 개나 깔아주어 잠자리를 아주 편하게 해 주었다.
일주일쯤 지나니 제법 움직일 만했다. 어머니 몰래 치료비를 부풀린 돈으로 동촌 금호강으로 나가 스케이트에 날을 세웠다. 깁스 조끼를 믿고 열흘 만에 얼음판으로 달려 나가니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하나님처럼 천지창조라도 할 것 같았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둘러매고 그들의 아버지가 신나게 뒹굴었던 금호강으로 달려 나갔다. 우리 부부도 아이들과 함께 강으로 나갔다. 얼음판 위에서 줄지어 달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었다.
##포장마차서 막걸리'고갈비 주문
링 주변에 있는 포장마차로 가 고갈비와 막걸리 한 병을 시켰다. 날 세울 돈이 없어 쫄쫄 굶고 다녔던 옛날이 환영처럼 망막에 어른거린다. "이 고갈비는 이십여 년 전부터 먹고 싶었던 것인데 오늘 처음으로 먹어보는 거요." 아내에게 서두를 생략하고 고갈비 얘기를 했더니 말귀를 못 알아듣고 도리어 "왜요"라고 반문한다. 가난과 남루를 설명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요즘 금호강은 얼지 않는다. 울고 싶은 데도 울지 못하는 사람처럼 강은 맨살로 이 겨울을 버티고 있다. 환경재앙의 전주곡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울리고 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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