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비담과 선덕여왕

입력 2009-12-28 07:21:21

비담이 검붉은 피를 내뿜으며 쓰러진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여왕을 향한 자신의 진심이 변하지 않았음을 전하려 한다. 여왕의 눈에도 눈물이 흐른다. 자신에게 연모의 정을 품었던 한 남자의 최후를 지켜보는 여왕의 눈빛은 잠시 흔들린다. 그러나 여왕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는다. 선덕여왕의 인기가 대단하다. 시청률 40%라는 열풍에 힘입어 경주의 선덕여왕릉에도 관광객이 많이 온다고 한다. 초반 미실과의 대립, 비담의 연모와 정치적 긴장 관계 등을 배치한 작가의 상상력이 사극 열풍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여왕을 사랑했던 비담의 꿈은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상대등이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지만, 자신의 핏속에 들끓고 있던 정치적 야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파멸을 자초한 남자. 염종은 "연모를 망친 건 폐하도 나도 아닌 너 비담이다"라고 말한다. 덕만이라는 한 여인과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비담의 바람은 정치적 풍랑 속에서 실현되지 못한다.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는 음모와 배신이 비집고 들어온다. 여왕과의 약속을 지켰더라면 덕만과 오순도순 살고자했던 비담의 소박한 바람은 이루어졌을까. 부질없는 상상이 안타까움을 불러온다.

역사 드라마의 주인공은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상이다. 왜 선덕여왕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주목받는가. 덕만은 남성주의자인 김부식도 칭찬한 인물로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여왕의 정치력을 이 시대가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정적이었던 미실의 세력마저 품고 가고자 했던 여왕의 처신을 기억해야 하리. 신국의 대업을 위해 반대세력마저 신뢰로써 포용한 것이다. 춘추와 유신이 비담의 제거를 주장했지만, 덕만은 비담을 믿음으로 대하지 않았던가. 신뢰를 상실한 정치는 끝내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자고로 권력에 대한 욕망은 상식을 초월한다. 자신의 주군을 배신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비담 역시 염종의 계략에 넘어가 여왕을 배신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왕의 자리가 탐나 정치적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밑바닥이다. 세종시를 두고 벌어지는 정치권의 공방도 결국 신뢰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신뢰에 금이 간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산출불가다. 행정수도를 믿고 실향의 아픔을 감수한 주민들은 자신들의 신뢰가 무너진 사실에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세모에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경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어디 이뿐이랴. 원칙과 상식에 대한 믿음이 훼손된 사회는 희망보다는 불신이 지배하기 마련이다. 내년 선거에 또 부질없는 희망을 걸어본다. 연휴에 경주 낭산자락에 잠든 선덕여왕릉에라도 다녀와야겠다.

이경희<달서여성인력개발센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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