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영어 발달사와 음성학을 가르친 선친은 바둑을 좋아하셨다. 특히 동료 교수들과 내기 바둑을 자주 두셨다. 기원에서 늦게 돌아오시는 날에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어머니께 드리곤 했다.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단 한번도 돈을 잃고 들어오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놀라운 실력(?)에 감탄하니 어머니께서 웃으시며 "네 아버지 요즘 용돈 다 떨어지셨을 걸" 하셨다. 맨날 내기에 이기시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잃은 날은 본전했다며 웃으시고, 조금이라도 딴 날은 돈을 몽땅 내게 주셨으니 지갑이 만날 적자일 수밖에"라고 하셨다.
어느 날 내기 바둑에서 돈을 꽤 잃은 듯했는데 의외로 표정이 밝으셨다.
"아부지 돈 많이 잃었어예?"
"응, 좀 많이. 그런데 실력은 엄청 늘었다. 내기에서 잃은 돈보다 훨씬 더."
아버지는 그렇게 손실이 생기거나 시련이 닥쳤을 때 합리화를 넘어 승화(昇化) 하실 줄 아셨다. 단 한번도 남 탓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군사정권 시절이라 2주간 군대에 가서 병영 체험을 해야 했다. 어느 날 동작이 굼뜬 옆의 친구가 총을 들고 딴짓을 하다가 내 눈을 찔렀다. 피가 쏟아지며 눈을 뜰 수 없었다. '이제 학교도 못 다니고, 의사도 못 되겠구나' 하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안경이 산산조각나며 유리 조각이 무수히 눈에 박혔다. 통합병원으로 후송돼 응급조치를 받고 약 30개의 유리 파편을 뺐는데 제일 큰 조각이 공막(눈 흰자위)과 렌즈(까만 부위) 사이에 남았다. 그걸 빼면 실명할 수도 있다고 했다. 며칠 후 부모님께서 병원에 오셨는데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께서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실망하지 마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행히 수술을 잘 마쳐 시력을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눈의 근육 하나가 터지고 말았다. 눈동자를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사물이 둘로 겹쳐 보였다. 좌절감과 함께 모든 것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나를 뒤덮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의사가 될 너에게 환자의 아픔을 몸소 가지게 함으로써 약간의 장애가 생겨도 그것은 오히려 널 더 강하게 할 것이고, 너보다 불우한 사람들을 네가 이해하게 할 것이다."
그때 만약 온 식구가 날 찌른 친구를 원망하고,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원망할 곳만 찾았다면 난 아무 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실망스럽고 원망스러운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상황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원망이나 남의 탓을 하기보다 승화시킬 줄 아는 지혜로움. 내 아이에게는 그런 지혜로움을 가르쳐 주고 싶다. 나의 아들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 사람들을 대면할 때, 늘 가슴에 품었으면 하는 말이 있다.
권오현 053)592-1491 nsdr17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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