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건배사

입력 2009-12-18 11:10:58

중국 춘추 5패(覇) 중 한 사람인 제나라 환공이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포숙 등 신하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술이 거나해질 무렵 환공이 갑자기 포숙에게 건배사를 하라고 했다.

술잔을 들고 앞으로 나선 포숙은 차분한 어조로 "전하에게는 왕자 시절 거나라에서 겪었던 고생을 잊지 않게 하고, 관중에게는 노나라에서 당했던 고초를 잊지 않게 하며…"라고 얘기한다. 이 말을 들은 환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숙에게 절을 올린다. 그리고 자신과 대신들이 포숙의 말을 잊지 않아야 나라가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화답한다.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말자는, 나아가 자신의 근본을 잊지 말고 더욱 분발하자는 뜻이 담긴 건배사에 얽힌 옛이야기다.

술자리가 많은 연말, 멋있는 건배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누구나 다 아는 뻔한 건배사를 했다가는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너무 경박하면 민망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조어(新造語) 만들기를 좋아하는 세태에다 재치까지 더해져 재미있는 건배사들이 숱하게 많다. 많이 알려진 사우나(사랑과 우정을 나누자)를 비롯해 미국 대통령 이름인 오바마(오직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변사또(변치 마라 사내놈아 또 만날 때까지), 재건축(재미있고 건강하게 축복받자) 등이 유명하다.

걸 그룹의 이름인 '원더걸스'(원하는 만큼 더도 말고 걸러서 스스로 마시자), '소녀시대'(소중한 여러분의 시간에 잔 대 보자)가 건배사로 등장하기도 한다. 남존여비 여필종부(남자의 존재 의미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며 여자는 필히 종부세를 내는 남자와 결혼하라), 마지막 술잔을 비울 때 하는 마돈나(마시고 돈 주고 나가자)도 회자하는 건배사들이다.

개인적으로 가끔 하는 건배사는 '당기나기'(당신이 기쁘니 나도 기쁩니다)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취재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한 봉사 단체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불교경전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중생들이 괴로워하기 때문에 나도 괴롭다. 중생들의 괴로움이 없어지면 나의 괴로움도 없어질 것이다"는 중생의 삶과 나의 삶이 둘이 아니라는 내용을 현대적으로 옮긴 것이다. 좋고 훌륭한 뜻을 담은 건배사들처럼 사람들의 소망이 모두 이뤄지고 사람 사는 향기가 가득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세밑이다.

이대현 논설위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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