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깡통 소고기

입력 2009-12-17 15:27:10

내 인생의 첫 뇌물 깡통 소고기 한 숟가락

초등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 전 해부터 빨갱이들이 산에서 내려와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더니 드디어 큰 난리가 나고 말았다. 다니던 하양초등학교가 육군경리학교에 징발당했고 우리는 야산 묏등에서 칠판 하나 들고 가서 야외수업을 받았다.

공부와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 학교를 징발당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놀이터인 공설운동장을 미군 전차부대에 빼앗긴 것은 두고두고 애통했다. 병사들은 얼음을 지치는 거랑(川)의 물웅덩이마저 캐터필러로 뭉개버려 우린 마음대로 놀 곳이 없었다.

콜라'사탕 얻어먹는 재미 쏠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미군들이 훈련을 할 때는 꼬마들이 팔을 뻗어 욕을 먹이기도 했으나 운동장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부대장은 아이들의 불만을 눈치 챘는지 몇몇 병사들을 보내 콜라와 사탕 등을 나눠 주었다. 어떤 날은 전투식량인 C 레이션을 들고 나와 깡통에 들어있는 닭고기를 맛보여 주기도 했다.

콜라와 사탕을 얻어먹는 재미는 정말 쏠쏠했다. 산비탈 학교에서 돌아오면 모두가 철조망 주위에 둘러서서 "헤이, 추잉검 기브 미"라고 소리 질렀다. 사탕이란 미국 말을 몰라 무조건 추잉검만 외쳐댔다. 미군들은 저들이 신명이 나야 사탕을 던져 주지 우리가 달란다고 주지 않았다.

우리 또래들은 또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신나게 욕을 먹였다. 병사들은 우리가 욕을 먹이면 자기네들이 좋아서 그러는 줄 알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병신 같은 바보들.

먹다 남은 깡통에 온 눈 쏠려

전차부대가 들어오고 보름쯤 지났을까. 일본식 이름이 '히데오'(英夫)란 아이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 내 또래인 그는 텃세하는 '졸무래기들'에게 잘 보이려고 호주머니 가득 사탕이며 껌을 갖고 나와 나눠 주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히데오는 심부름이나 하는 똘마니에서 정식 대원으로 편입이 되었다.

병에 들어있는 코카콜라 한 모금과 사탕 한 알 얻어먹는 것이 좋아 아무도 그를 해코지하거나 '티방'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히데오의 형이 전차부대의 하우스보이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누나가 양공주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위상은 다시 똘마니로 곤두박질쳤다.

히데오가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처신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그의 누나가 알았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다음날부터 들고 오는 메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철조망 옆 개울가의 움푹 파진 곳에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있는데 환한 웃음을 웃으며 히데오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시골에서 두레박으로 만들었던 미제 양철통이 들려 있었다. 아이들의 눈은 온통 먹다 남은 그 깡통으로 쏠렸다.

히데오는 호주머니에서 뿔 숟가락 하나를 끄집어내더니 "순서대로 한 숟갈씩 먹어봐라"며 대장 격인 태득이에게 먼저 넘겨줬다. 한 번 먹고 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까봐 모두가 꾹꾹 눌러퍼 먹었다. 나는 세 번째 차례였다. 그것은 소고기를 잘게 썬 것으로 두 눈에 쌍불이 켜질 정도로 기가 막히게 맛있는 음식이었다.

히데오는 깡통 소고기를 우리들에게 먹인 후 다시 대원으로 승진했다. 그의 서열은 누나의 애인인 흑인 하사가 전방으로 이동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병정놀이할 때 내 뒤에 섰던 히데오가 깡통 소고기 파티를 연 다음날부터 내 앞에서 활보를 해도 그가 밉지 않았다. 내 생애 첫 뇌물의 기억은 아마도 그 깡통 소고기 한 숟갈이었던 것 같다. 뇌물을 먹어 본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은 어릴 적 내 맘과 똑 같았으리라.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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