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국화빵

입력 2009-12-10 11:05:05

갓 구워낸 노란빵…온 몸에 전해오는 따뜻함

국화빵은 성탄절 음식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교회에서 밤샘으로 보내고 새벽에는 구역별로 팀을 짜 새벽송을 돌았다. 날씨는 차고 돌아야 힐 길은 십리가 넘었지만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기 때문에 피곤한 줄을 몰랐다.

교인들 집 앞에 이르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의 찬송가를 불렀다. 그러면 새벽송 찬양대가 오기를 기다리던 신자들은 떡이며 과자를 내주었고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댁에서는 현금을 주기도 했다. 이날 받은 돈은 국화빵 값으로 충당되곤 했다.

##성탄절 예배후의 잊지못할'선물'

나는 태중 교인으로 유년주일학교는 고향인 하양교회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대구 남산동 옛 화장터 입구인 아주 작은 교회의 고등부를 다녔다. 크리스마스의 추억도 국화빵 맛을 알았던 고등학교 시절의 것이 가장 강렬하게 많이 남아 있다. 새벽송 팀을 짤 때는 나름대로 어느 팀에 붙어야 국화빵 값이 가장 많이 나오는지를 미리 계산하여 줄을 섰다. 다년간 경험에 의한 '찍기'는 적중했고 마치고 나면 다른 팀보다 배당은 월등 많았다.

당시에 가장 맛있는 음식은 단연 국화빵이었다. 사탕을 빨기에는 늦은 나이였고 떡은 구식인데다 감미가 적어 별로였다. 갓 구워 낸 국화빵을 손에 쥐면 '노고지리'가 부른 '찻잔'이란 노래가사처럼 '온몸에 전해오는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르는'것 같았다. 새벽송 찬양대장은 교인들로부터 받은 음식을 성탄 예배 후에 있을 회식을 위해 본부로 보냈지만 현금은 고등부 학생들에게 "국화빵이나 사먹어라"시며 돌려 주셨다.

그분은 그때 신학생이었다. 모르긴 해도 살아계신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거나 일찍 소천하셨다 해도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 예배 볼 때마다 들어오는 연봇돈을 관리하면서 어린 학생들의 군것질 비용만은 따로 떼어 두었다가 내려 주시고 계시리라. 나는 지금도 음식을 앞에 두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면 그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축복의 손길을 내밀어 달라"고 부탁드린다.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끼면 감사하는 마음이 이렇게 오래 가는 법이다.

나의 국화빵 사먹기는 정확히 말하면 중학교 삼 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골뜨기가 도시의 중학으로 진학하여 물정을 익히기 까진 일이년이 걸렸다. 도시 생활이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거짓말이 늘어났다. 국화빵을 사먹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최소한의 교통비만 용돈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것으론 태부족했다.

대구역에서 학교가 있는 대봉동까진 쉽게 걸어 다녔지만 그것으론 모자랐다. 그래서 수학에 나오는 낯선 용어들을 책이나 교재로 둔갑시켜 "안 사면 큰일 난다"고 거짓말하여 돈을 받아냈다. '방정식'도 팔았고 때로는 '소수점 이하'도 문방구에서 사야했다. 어머니는 몰라서 속고 알면서도 넘어갔다. 고등학교 때는 꾀가 점점 늘어 '인수분해'와 '피타고라스 정리'도 책이라고 우겨 석 달 동안 말린 닭똥 판 돈을 몽땅 빼내기도 했다. 어머니! 그래서 어머니가 더 그리운지 모른다.

##"안 사면 큰일" 국화빵 살 돈 빼내

중3 때 단짝이 영태라는 아이였다. 그는 뜨거운 국화빵을 나보다 세 배쯤 빠르게 먹어 치웠다. 그것도 모르고 하루는 둘이서 십 환씩을 내어 국화빵을 사먹으러 갔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나는 몇 개 먹지도 못하고 입천장만 데였다.

다시는 그 친구와는 국화빵 공동구매는 하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사람이 하는 일들이 맘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 후부터는 쟁반에 금줄을 치듯 네 것 내 것으로 편을 갈랐지만 친구는 제 것 다 먹고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번번이 넘어섰다. 나는 분통이 터졌다. 이 짐승 같은 놈.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아름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가 교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송을 돌고 싶지만 교회는 없어졌고 요즘은 새벽송도 돌지 않는다. 따끈따끈한 국화빵 한 봉지를 사들고 '징글 벨'이 징글징글하게 들리는 밤거리나 거닐어야겠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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