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달구벌이야기](46)마음만은 부자여던 문인들(上)

입력 2009-12-10 09:02:17

문학으로 아픔 달랜 '향촌동 베레모'

1950년대 중반, 정전이 되자 피란 문인들이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한동안 대구의 문화계는 공허감에 빠져 있었다. 다들 가난하고 구차했던 그 시절, 다방가를 돌며 갖은 기행으로 고단한 사람살이에 훈기를 더해 주던 문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이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으나, 당시 문단의 좌장 노릇을 하던 시인 백기만(白基萬, 1901~1967)은 '예술가란 다 그런 사람들'이라며 너그럽게 감싸주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였던 사람들이라 하겠다. 시인 박훈산과 시인 정석모가 그 주인공이다.

박훈산(朴薰山, 1919~1985)은 청도 출신으로, 일본 니혼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그는 1946년 부산 국제신보에 '노래 다시 부르리'라는 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시집 '날이 갈수록' '박훈산 시선집'을 남겼고 1958년 경상북도 문화상을 받았으며 1962년 청마 유치환과 더불어 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경상북도지부를 창립하여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 해 예총 주관으로 제1회 신라문화제를 경주에서 개최했는데,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참석했었다.

그는 좋은 가문,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도 으스대거나 젠체하지 않았고, 그만큼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온유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방이나 대폿집에서 시를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서민적인 소탈함이 있었는가 하면, 쉽게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물려받은 적잖은 재산을 경마와 도박 같은 데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지만, 문학으로 아픔을 달래며 한 세월을 살다 갔다.

그는 베레모가 잘 어울리는 시인이었다. 마른 체구에 큰 키로 휘적휘적 걸으면서 향촌동의 보스 행세를 하고 다녔다. 발 또한 커서 꽤 큰 신발을 신고 다녔고, 그의 유난히 큰 신발을 빗대어 '보트'라 불렀는가 하면, 겅정겅정 걷는 모습을 보고 '저기 말이 간다'며 웃기도 했었다. 그는 향촌동에서 살다시피했고, 살으리'몽파리'파초 다방에 단골로 드나들었으며, 커피 한 잔으로 온종일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런 사람을 달가워할 리 없지만, 그 같은 눈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웃지 못할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옛 구세군 본영 옆에 있던 제일다방 앞길에서 자살 소동을 벌인 적이 있다. 미모의 다방 마담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최후 수단으로 약을 먹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죽은 척 연기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연기는 통하지 않았다. 마담이 그 같은 사실을 알고도 밖으로 나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신동집 시인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남긴 시를 찾아 읽으며 그의 삶을 떠올려본다.

눈 둘 곳을 몰라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어 보면/ 기인 손가락 사이로/ 모두다 잘 났구나.// 발 돋움할/ 한치의 지역마저 없는데/ 신경은 하야니 얼어 붙고.// 밝은 거리에 함부로/ 나서는 여인/ 그 삐뚜러진 여인의/ 얼굴.// 얼빠진 행렬은/ 가까운데로만/그저/ 줄지어 가고.// 인생은 저마다 가는거라/ 허지만……/ 가는 길은 하난데.//

- '가는 길은 하난데' 가운데서 발췌

그는 지독한 역마살의 소유자였다. 가정은 저만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고, 보다 못한 아들이 찾아 나섰지만 막무가내였다. 한번은 문인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던 무랑루즈에서 아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고등학교 학생이던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입시다" 하면서 눈물로 호소했으나 연방 담배만 피워 대면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그 뒤 좋아하던 술을 끊고 지병으로 고생하다 세상과 하직했고, 장례는 대구문협 주관으로 장남의 집이 있던 청구고등학교 뒤편 공터에서 치러졌다.

(이 글이 고인이나 유족에게 누를 끼쳤다면 용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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