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신문 방송에는 이런저런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영재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한결같이 똑똑하고 자신감 넘치고 말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얼굴도 잘생기고 옷차림도 세련된 데다 예의범절까지 갖추어, "야, 저런 영재를 자식으로 둔 부모는 얼마나 좋을까"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게다가 그들 입에서 "공부, 그거 별것 아니더라"는 말까지 나오면, 감탄은 이내 한숨으로 바뀌며 공연히 곁에서 밥 먹는 아들 녀석 뒤통수를 째려보게 되는 것이다.
'엄친아'는 이 시대의 우상이다. 처음에는 누리꾼들 사이에서 냉소와 자조 섞인 우스개로 시작된 이 말이, 어느새 모두의 우러름을 받는 '이상형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엄마 친구 아들'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 공부도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고 운동도 잘하며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다. 영어 잘하고 노래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는 데다가 집안은 부유하고 친척은 권력층 아니면 재벌이니, 이쯤 되고서도 우상이 아니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겠다.
우리가 엄친아에게 탄성과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사이에 수많은 '보통 아이들'은 뒤로 밀려나 점점 오그라든다. 아이들이 누군가를 우상으로 삼고 동경하며 닮으려고 하는 건 말릴 일도 아니요 나무랄 일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의 엄친아가,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닮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란 데 있다. 외모와 집안과 타고난 능력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공부 잘하는 일도 이제 '성실한 노력'만으로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안다. 자녀의 성적이 부모의 경제 능력에 비례한다는 건 요즘 세상의 상식 아닌가. 이래서 대중매체를 주름잡는 엄친아의 화려한 모습은 많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초라함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더 많이 차지하기'를 향한 끝 모를 경쟁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우리 사회에 패자 또는 약자를 위한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아이들은 겨우 말을 배울 무렵부터 '남을 이겨야 내가 사는' 혹독한 정글의 법칙을 배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어른들로부터 "남에게 뒤처지면 패배자가 될 거야"라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지만 "네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어라"는 가르침은 거의 듣지 못한다. 남을 뿌리치고 내달은 이들은 승리자가 되어 모든 과실을 차지하고, 남과 어울려 함께 간 사람들은 '낙오자'의 낙인과 함께 비정하게 버려지는 사회는 문명사회가 아니다.
더구나 백 사람 가운데 '일등'을 차지한 사람만이 행복해지는 경쟁이라면, 나머지 아흔아홉 사람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런 경쟁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뒤처진 아흔아홉 사람에게 따뜻한 눈길이라도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영재는 물론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꼴찌로 붙은 사람이나 떨어진 사람도 똑같은 무게로 격려와 응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신문 방송에 아무리 잘난 엄친아가 나와도, 곁에서 밥 먹는 우리 아들의 '인격적 존엄함'이 손상되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가끔 도서관 같은 데서 마련해 준 자리에 독자들을 만나러 가면,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정작 이런 행사가 필요한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도시와 부유한 곳에는 문화시설이 넘쳐나고, 그런 곳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문화행사가 열린다. 시인과 작가, 음악가와 화가와 연극'영화인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온다. 그러는 동안 두메산골과 낙도의 작은 마을 주민들은 오로지 텔레비전 라디오만을 벗삼아 쓸쓸히 세월을 보낸다. 일 년 가야 문화행사 한번 못 보고 문화예술인 하나 만나지 못 하는 곳, 그런 곳에서 자란 아이들을 대도시 아이들과 똑같은 자리에서 견주는 건 온당치 않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엄친아 아닌 보통 아이들에게 돌려야 하는 사정이 이러하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가난한 나무꾼'은 아는 것도 없고 겉모습도 볼품없지만, 그래서 엄친아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약자이지만 어떠한 어려움도 다 이겨내고 끝내 행복하게 잘 살지 않는가. 세상의 주인공은 특별한 힘과 재주를 가진, 또는 기득권을 가진 몇몇 승리자들이 아니다. 오늘도 안 보이는 곳에서 이웃과 어울려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루저'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서정오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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