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 하지만 결코 해피할 수 없는 결말
어릴 적 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흔히 지푸라기 하나 잡을 수 없다는 말을 쓰는데, 그때 그 공포를 처음 느꼈다. 내 몸의 어떤 부분도 어디에 닿지 않는, 절해의 공포였다. 기억을 못 하지만 이런 느낌의 최초의 공포는 태어날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무슨 일이 닥칠지, 내 앞에는 뭐가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컴컴한 산도(産道)를 빠져나올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살면서 몇 번에 걸쳐 이런 느낌을 가졌다. "에이고, 그렇지 뭐"라며 자신을 다독거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최근의 일이다. 10대나 20대에 느낄 때는 정말 힘들었다. 이틀 전 수능시험을 친 수험생 중에서도 이런 느낌을 느꼈던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주머니에 손 넣고는 절대 사다리를 오를 수가 없다. 사다리를 잡아, 힘을 실어 몸을 끌어올려야 오를 수가 있다.
더스틴 호프먼의 '졸업'(1967년)이란 영화가 있다. 국내에는 1970년대 초에 개봉됐다. 대학을 졸업한 한 젊은이가 어머니의 친구와 끔찍한 불륜을 저지르는 영화라고 '성인 영화'에 분류됐다. 몇 번의 앙코르 로드쇼를 거쳐 내가 보게 됐을 때는 개봉 후 10년이 넘었을 때다.
'졸업'은 미국 동부의 일류 대학을 졸업한 벤 브래덕(더스틴 호프먼 분)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집으로 귀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브래덕 부부는 유일한 자식인 벤이 반드시 출세하리라는 것을 믿으며 아들의 귀가에 맞춰 졸업축하 파티를 열어 준다. 그러나 벤은 장래에 대한 계획이 전혀 서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불안하고 거북할 뿐이다. 그때 로빈슨 부인(앤 밴크로프트)이 그의 방으로 찾아와 유혹한다.
막연하게 허송세월하던 벤은 로빈슨 부인과 불륜을 시작하고, 그녀의 딸 일레인(캐서린 로스)이 등장하면서 묘한 삼각관계가 된다. 어머니와의 관계를 알고 일레인은 그를 멀리한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벤은 일레인의 결혼식장을 찾아가 주위 사람들의 저지를 뚫고 일레인의 손을 잡고 식장을 도망쳐 나온다.
'졸업'에서 기가 막힌 것은 바로 더스틴 호프먼의 캐스팅이다. 곁눈 팔지 않은 모범 장학생, 촉망받는 미래, 부유한 집의 착한 외동아들, 그러나 졸업 후 엄습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방황하는 젊은이…. 더스틴 호프먼 최고의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벤 브래덕의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고 있다.
'졸업'의 원작은 1963년 미국 소설가 찰스 웹이 발표한 소설이다. 독자도 별로 없던 B급 소설이었다.
소설 속에서 벤은 183㎝의 키에 금발,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 웅변 팀의 회장을 지냈고, 육상선수로 몸도 다진 우람한 '서프보드 타입'이었다. 더스틴 호프먼과는 천양지차(?)이다.
알다시피 더스틴 호프먼은 168㎝로 왜소하고, 검은 머리에 이국적인 외모다. 누구 말대로라면 '루저'급에 속한다. 정통적 주류 미국인인 '와스프'(WASP)와 한참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 캐릭터를 맡은 것은 '파격'이고, 엄청난 '모험'이다.
처음 영화가 기획될 때 로버트 레드퍼드가 벤 역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78㎝의 키에 귀공자 타입으로 이 역에 적격이었다. 더구나 브로드웨이 변두리 극장에서 변변한 역도 맡지 못하고 있던 10년 무명배우 더스틴 호프먼과 달리 레드퍼드는 60년대 '메버릭' '네이키드 시티' 등 인기 TV시리즈로 얼굴이 알려진 'TV의 꽃미남'이었다.
누가 봐도 벤 역은 로버트 레드퍼드가 적격이라고 여겼다. 또 아버지 역은 로널드 레이건이, 어머니역은 도리스 데이가 거론됐다. 그러나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역은 더스틴 호프먼에게 낙점됐다.
여러 차례 '졸업'을 보면서 과연 '이 역을 로버트 레드퍼드가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한 젊은이의 사랑 성공기'로는 무난했을 것이다. 부유한 집 아들로, 어머니를 '농락'(?)하고 마침내 딸까지 쟁취한 '엽기 러브 스토리'로 60년대 미국 사회를 흔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접한 한 젊은이의 불안과 방황이 녹아들었을까.
'허접한' 원작 소설을 '아버지 세대'와 단절하고 홀로서기하려던 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고뇌로 은유시킨 것은 바로 더스틴 호프먼이다. 보잘것없는 외모, 10년 무명배우의 몸에 밴 불안감 등이 캐릭터를 절묘하게 증폭시킨 것이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제작 방식을 거부한 '졸업'은 대성공을 거뒀다. 최종 영화 흥행 성적이 5천만달러. 요즘 돈으로 치면 1억7천500만달러다. 당시 제작자 로렌스 터만은 20달러 원가의 이 책을 1천달러를 주고 저작권을 샀다. '거저 주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모험을 성공으로 일궈낸 것은 감독 마이크 니콜스였다. 그는 연극과 TV에서 활약하다 더스틴 호프먼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원작과 전혀 다른 해석으로 영화를 새롭게 만든 인물이다.
특히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벤과 드레스를 입은 일레인은 예식장을 벗어나, 버스를 탄다. 의아해하는 승객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최고 뒷자리에 앉는다. 둘은 성공한 것이다. 사랑도 얻었고, 홀로서기도 이뤄냈다. '꽉 막힌' 부모와 친지들과도 작별했다.
이 정도 되면 둘은 정말 성공적인 사랑을 쟁취한 셈이다. 그러나 둘은 정말 성공했을까.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부유한 부모도 없고, 조언을 해 줄 친지도 없다. 버스에서 내려갈 곳도 없다. 이제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영혼일 뿐이다. 그들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다.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불안해한다. 그리고 둘을 태운 버스가 멀어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해피엔드지만, 절대 해피할 수 없는 결말, 마이크 니콜스의 기가 막힌 연출이 아닐 수 없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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