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계승'에 바친 외길 인생…名匠의 예술혼이 살아 숨쉰다
문경은 장인(匠人)의 혼(魂)이 담긴 고장이다. 찻사발로 대표되는 문경도자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또한 국가지정 방짜유기장이 있고, 조선왕조실록 복원에 쓰이는 한지도 문경 한지장의 '것'이다. 임금의 칼인 사인검의 장인, 전통주와 자수공예의 장인의 예술 터전도 바로 문경이다. 이번 주 테마여행으론 장인들의 예술혼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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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 60년, 방짜유기장
문경 가은읍에서 농암쪽으로 가다보면 길 옆에 납청유기촌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비탈길을 올라서면 전통양식의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와 유기를 만드는 장소 같지가 않다. 마치 고풍스런 박물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선생의 외길 60년 장인혼이 담긴 곳이다. 그는 국가가 정한 우리나라 유일의 방짜유기분야 유기장이다. 그의 작품은 '납청방짜유기'라 부른다. 유기촌 한 켠에는 커다란 비각이 서 있다. 그가 스승을 위해 지은 사적비다. 사적비의 지붕은 모두 방짜유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꽤 괜찮은 볼거리다.
납청방짜유기는 동(구리) 16냥에 석(주석) 4량 5돈을 정확히 합금해 만든다. 이물질이 섞이면 단조가 안 되므로 결코 양을 속일 수 없다. 인체에 해로운 것을 접하면 색이 변해 버린다. 그래서 이봉주의 작품이 인정받는 것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만찬, 부시 대통령 방문 때의 만찬,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만찬장에 쓰인 식기 등이 모두 이봉주의 '것'이다.
그의 고향은 평북 정주군 덕언면으로 인근에 방짜유기를 만드는 납청마을이 있었다. 22세 때인 1948년 월남해 서울 용산에서 납청 방짜유기공장을 크게 하던 스승 탁창여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았고, 1957년 서울 구로동에서 방짜유기공장을 설립,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1982년에는 제7회 전승공예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았고, 1983년에는 드디어 중요무형문화재 유기장으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1960, 70년대 식기의 현대화를 거치면서 유기는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는 외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경기도 안양, 안산 등을 거쳐 2003년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에 작업장과 전시장, 판매장을 모두 갖춘 유기촌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는 이달 6일부터 3일간 제자들과 함께 옛 전통방식 그대로의 방짜유기제작법을 일반에 공개하는 뜻깊은 행사를 가졌다.
그의 장인혼은 현재 아들이 잇고 있고, 8명의 제자들도 장인혼을 배우고 있다. 대구의 경우 팔공산 초입의 방짜유기박물관에 이봉주 선생의 많은 작품이 전시돼 있고, 중구 대봉도서관 인근에 납청유기 대구전시장이 있다. 서울에도 2곳의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58년 뚝심, 한지장
유기촌을 나와 농암면 내서리를 향해 10여분 달리다 보면 '무형문화재 제 23-나호, 문경전통한지'라는 조그마한 안내판이 보인다. 마침 한지장 김삼식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우리 것', '전통', '토종'만 있었다. 한지장은 거침없이 '대한민국 1등'이라고 했다. 그의 한지는 국보인 조선왕조실록 복원에 쓰이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록 밀랍본 복원을 위해 전국의 한지를 찾은 끝에 그의 '작품'을 실록 복원 한지로 선정한 것이다. 최고의 품질을 입증받은 것. 그의 작업장은 '삼식지소(三植之所)'다. 진실, 양심, 전통을 마음에 심어야 최고의 한지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담겼다. 58년 뚝심이 담긴 곳이다.
그의 한지 제작에는 인공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다. 한지의 질을 좌우하는 좋은 닥나무를 얻기 위해 우리나라 토종 참닥나무를 직접 재배하고 있고, 100여년 동안 재배되고 있는 토종 황촉규(종이풀)만 이용해 전통한지를 만들고 있다. 한지제작 과정 중 가장 많은 시간과 기술이 요구하는 작업은 바로 백피작업. 화학약품으로 표백을 하는 경우가 적잖지만 김삼식 선생은 직접 재배한 참닥을 일일이 긁어내 백피로 만들고 있다. 또한 백피를 부드럽게(자숙) 하는데 필요한 잿물도 양잿물이 아닌, 메밀대와 콩대 등을 이용해 만든 천연재만을 고집한다. 물도 집 인근 계곡에서 흐르는 자연수를 그대로 쓰고 있다.
그가 생산하는 한지는 겨울에만 볼 수 있다.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만 한지를 생산한다. 그 이유를 물었다. "화공약품을 안 쓰니까 여름철 등에는 한지를 만드는 재료들이 썩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겨울철에 작업을 합니다. 여름에 만드는 한지는 품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우리의 방식만 고집하기에 중국에서 화학약품으로 처리한 닥나무를 쓰거나 백피를 칼로 긁지 않고 약품을 사용한 제품보다 생산량이 턱없이 적다. 반면 인건비가 천정부지다. 일년에 고작 몇백 장 수준이며 인건비는 대량생산 제품의 인건비가 25만원이라면 자신은 1천만원은 될 것이라고 했다. 한 우물만 판 그의 뚝심은 이제 전국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아들도 가업을 잇고 있다. 그는 천연염색지 등 다양한 한지 개발과 함께 학생들에게 한지체험교육을 시키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사인검의 명인
농암면의 한 폐교에 세운 고려왕검연구소 이상선씨는 보기 드문 도검(刀劍)의 장인이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학업을 접고, 도검에 매달렸다. 그때부터 대장간, 청동과 함석을 다루는 공장, 공방, 주물공장 등을 전전하며 칼에 대한 나름의 지식을 쌓아왔다. 칼은 종합예술품이라고 한다. 금속공예는 기본이며 칼집을 만들고 장식하는 목공예, 가죽공예, 손잡이에 술을 다는 매듭공예를 모두 터득해야 한다. 그는 1999년 경기대학교 박물관에 전시하게 된 작품을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는다. 철퇴와 창, 검 등을 고증한 뒤 제작하는데 3년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그는 지금 그동안의 경험과 노력, 고증의 결실물로 임금의 검인 '사인검'(四寅劍)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 여러 검이 있어왔지만 왕의 칼인 사인검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신성함을 지닌 상징물이다. 도검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평생에 한 번은 도전하고픈 것이 사인검 제작이다. 사인검은 12간지 중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이 네 번 겹쳐지는 때, 즉 호랑이의 해(寅年), 호랑이 달(寅月), 호랑이 날(寅日), 호랑이 시간(寅時)에 만들어야 해 60년 만에 한 번 제작되는 귀한 검이다. 사인검은 한 면에는 각종 별자리 모양, 다른 면에는 칠성문이라 불리는 27개의 한자가 상감기법으로 새겨진다. 외적의 침입과 재앙, 내부의 악도 베어내겠다는 뜻이 간직돼 있다고 한다. 2010년이 사인검이 만들어지는 해라고 한다. 이씨의 사인검도 내년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다.
◆자수와 전통주, 찻사발
문경 산북면 호산춘(湖山春)은 조선 세종 때 명승인 황희 정승의 증손 황정이 산북에 집성촌을 이뤄 살면서부터 종부에 의해 전승돼온 가양주(家釀酒)이다. 호산춘 기능보유자는 종부 권숙자씨로 무형문화재 제18호다. 우리나라 문헌에선 한산춘, 약산춘 등 '춘'(春)자가 들어가는 술을 최고급 술로 여겨왔다. 하지만 현재 술 이름에 '춘'자가 들어가는 전통주는 산북 황씨 종가에서만 전승되는 '호산춘'이 유일하다. 문경 호산춘은 신선이 좋아한다고 해 '호선주', 술맛에 취해 임무도 잊고 돌아갔다 해 '망주(妄酒)'라고도 했다. 종택을 찾아 호산춘 본향의 맛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문경 산양면 송죽리 덕암마을에는 무형문화재 김시인 자수장이 있다. 선생의 스승은 전통 자수계의 거장인 김계순 선생이다. 김계순 선생만의 특수기법인 침선에 자수를 접목시키는 비법을 완벽하게 전수받았다. 근래엔 자수기예 중 가장 어렵다는 열쇠패 재현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또한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육골침'을 통해 사라져가는 자수기법을 복원하기도 했다. 문경시 문경유교문화관에 김 자수장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찻사발로 대표되는 문경도자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문경에는 현재 20명이 넘는 도자기 장인들이 있다. 영남요의 김정옥 선생은 국가가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이다. 7대에 거쳐 문경도자기의 가업을 이어오는 명인이다. 묵심도요의 이학천 선생은 2002년 최연소 대한민국 도예명장이 됐다. 역시 집안에서 7대 도예가의 맥을 잇고 있다. 문경요의 천한봉 선생은 2002년 일본의 왕이 황실에 사용할 도자기를 주문할 만큼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도자기 명인이다.
이종규기자 jongku@msnet.co.kr
사진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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