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읍지 풍수 지닌 곳, 아도화상 '한국의 불교' 열다
구미의 정중앙을 꿰뚫고 있는 것은 바로 낙동강이다.
상주시 낙동면을 지나 구미 옥성과 도개가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구미 시가지를 지나 칠곡 약목과 석적이 만나는 지점까지 약 100리다. 상주와 의성 단밀을 지나 구미 구간에 진입하는 낙동강은 강폭을 더욱 넓힌다. 강폭이 넓은 곳은 건너편이 아련하게 보일 정도였다. 해평습지 등 일부 구간의 경우 그 폭이 1㎞는 족히 넘어 보였다. 구미의 낙동강은 이전 낙동강의 모래사장과 자연습지(크고 작은 숲섬이 꽤 많다)의 완결판이다. 해평습지는 낙동강 1,300리를 가장 대표하는 자연습지이자 철새들이 모여드는 장소이다. 물고기가 풍부하고, 습지가 잘 보존돼 있어 철새들이 노닐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없기 때문이다.
해평습지가 가장 알려져 있겠지만 낙동강의 구미 구간 전체는 시가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곤 거의 모래사장과 습지, 그리고 강물이 어울려 낙동강의 장대함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구미의 낙동강은 구미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고 있다. 독특했다. 서쪽에 위치한 지역은 북에서 남으로 옥성, 선산, 고아, 구미시가지이고 동쪽에는 도개, 해평, 산동과 구미시가지 반쪽이 있다. 그래서 구미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도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큰 강은 한강의 서울과 낙동강의 구미 뿐이라고 했다.
권삼문 구미시 학예연구사는 "서울과 구미는 도시 한가운데를 큰 강이 가로 지르고 있고, 남산과 금오산이라는 이름난 산을 병풍으로 하고 있다"며 "이는 한 나라의 도읍지 풍수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구미 사람들은 임금이 날 산이라는 예언이 있는 금오산과 바다와도 같은 낙동강을 모두 가져 구미를 한 나라의 수도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구미의 낙동강은 상주에서처럼 오랜 세월 우리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옛날 삼국이 자웅을 겨룰 때 삼국의 문물이 오갔고, 또한 다툼도 많았다.(삼국 격전지였다) 신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아도화상도 한강을 건넌 뒤 백두대간의 옛 대로인 문경 하늘재를 넘어 김천을 거쳐 이곳 구미의 낙동강에 들어왔다. 외부에서 신라를 드나드는 가장 큰 길목이 바로 구미의 낙동강이었다. 구미의 낙동강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전략 요충지이기도 했다. 후삼국이 경쟁하던 당시 고려를 세운 왕건은 구미의 낙동강 상류와 낙동강 중류의 제 1지류인 감천이 만나는 곳에서 후백제와 최후의 한판 승부를 벌이기도 했다.(일리천 전투)
구미의 낙동강은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는 가장 큰 길인 영남대로가 지났다.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영남 선비들은 구미의 낙동강 길을 오르내렸다. 상주의 낙동과 의성의 단밀, 구미의 도개를 접하는 낙동강 일대는 낙동강 중·상류의 최대 물류기지이자 유통처였다. 크고 작은 나룻배가 쉼없이 오갔고, 나루를 통해 경북 중·북부와 충청도, 전라도 땅에 사람이 드나들고, 물자가 전파됐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선산 원리의 강창나루, 고아 예강리의 강정나루, 구미시 비산동의 비산나루는 낙동강의 제법 큰 나루였다.
사람과 자연을 가진 구미의 낙동강엔 첨단이 새식구로 전입했다. 사람은 곧 인재향 구미요, 자연은 낙동강의 더 넓은 모래시장과 습지, 첨단은 바로 국내 최대 내륙산업도시 구미다. 구미는 자연과 사람, 첨단이 조화를 이뤄가는 도시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낙동강을 둘러보고 해평 냉산의 도리사(桃李寺)로 향했다. 첨단도시 구미는 신라 불교 최초의 전래지였다. 신라의 불교는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단순한 종교가 아닌,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발전했다. 구미는 그 첫 장을 연 곳이다. 또한 신라 불교는 삼국 중 불교의 전승이 가장 늦었지만 고려-조선-현대에 이르는 한국 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권삼문 구미시 학예연구사는 "고대의 종교는 한 시대를 만들어내는 문명의 역할을 했으니 구미는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뿌리내린 고대문명의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도리사는 절 입구 안내문에는 "한국불교는 한민족 역사와 함께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기틀은 해동 불교의 초전지인 선산의 도리사에서 비롯됐다. 묵호자(墨胡子)로도 알려진 아도화상은 신라 불교의 공인(법흥왕 15년 528년)에 앞서 눌지왕대(417~450년)에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일선군(선산의 옛 명칭) 모례장자의 집에 머문 바 있다. 그는 "선산의 도개에서 오색의 복사꽃이 눈 속에서 피어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절을 지었으니 이가 곧 해동 불교 최초의 가람 도리사다"라고 적고 있다.
도리사는 절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떠나 우리에겐 '보고 또 보고' 싶은 절부터 다가왔다. 가람 배치가 산 중턱에 서열을 지은 듯 나란했다. 가팔랐다. 절 뒤 병풍인 송림을 정원수로 가격을 매긴다면 가격을 논하기 어려울 만큼 빼어났다. 송림 속에는 수백개의 나무 의자가 배치돼 있는데, 절을 찾은 이들에게 참선과 휴식의 공간이었다. 이보다 더 자연스런 포교가 있을까.
도리사의 또 다른 자산은 경내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이었다. 지리산 정상에서 사방을 볼 때 느끼는 만물군상의 축소판이라고나 할까. 크고 작은 산들이 낙동강을 에워싸고 있는데다 이른 새벽에나 볼 수 있는 연무가 어우러져 마치 이상의 세계를 바라보는 듯했으니 말이다. 아도가 냉산에 도리사를 창건한 이유가 복사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경내의 아도화상 좌선대도 지금은 주변에 수풀이 우거졌지만 낙동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현재의 도리사 자리는 창건 때 도리사 터는 아니다. 본래의 도리사는 불타 없어졌고, 그 속암이었던 금당암(金堂庵)을 중심으로 중창을 거듭한 것이 지금의 도리사이다. 도리사의 옛터는 현재 냉산 남쪽 기슭, 도리사(금당암)로 올라오기 전 계곡 주위에 석축지가 위치한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여기가 옛 도리사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 터는 대웅전, 누각 등의 건물을 조영할 수 있을 만큼 넓었고, 지금도 절의 흔적을 알려주는 와편(기와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리사 경내에는 아도화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유물들이 남아 있었다. 아도화상 좌선대가 그러하거니와 좌선대 바로 뒤에는 아도화상 사적비가 서 있다. 높이가 3m는 됨 직하다. 조선 인조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 전래자 아도에 대한 숭배가 극진했음을 알 수 있다. 도리사 조사전은 아도화상의 진영을 봉안했던 곳이다. 지금은 분실 등의 문제로 도리사의 본사인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겼다. 도리사에는 아도화상 석상도 있었다. 1976년 도리사 경내 석탑 및 담장 석축을 정비하다가 석상 1구가 발견됐는데, 당시 아도화상의 얼굴과 같은 조각상이라 하여 관심을 모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아도는 왜 불교의 전래지로 일선군을 택했을까?
일선군은 신라 서북방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라는 고구려가 국원성(지금의 충주)을 남진(南進) 거점으로 삼아 소백준령 이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일선군을 중심으로 방어했고, 신라가 소백준령 이북으로 진출할 때에도 일선군을 거점으로 삼았다. 일선군은 추풍령을 넘어 보은과 청주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신라와 고구려는 일선군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접촉했고, 이 과정에서 불교도 민감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전래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충주에는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일선군에 온 아도는 지금의 도개면을 주목하게 된다. 현지의 구전,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 등을 종합해 보면 현재의 도개면 도개 2리가 첫 전래지역으로 모아진다. 도개리의 '도개'(道開)는 '불교를 열었다' 혹은 '불도를 개시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개리가 바로 아도가 왔던 신라시대 도개부곡인 동시에 모례장자가 살던 곳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구미의 향토지인 '일선지', 도리사 아도화상사적비 등에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도는 모례장자의 집에 굴을 파고 살며 낮에는 가축을 치고, 밤에는 불법의 진리를 강론하며 3년 동안 살았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가 융성했으나 신라는 고유의 신앙과 외래 문물에 대해 배타적이어서 불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으니 아도는 숨어서 포교를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도개 2리에는 아도가 와서 거처한 모례(毛禮)장자의 집으로 추정되는 '모례장자터'가 있고, '모례장자샘'으로 이름지어진 유적도 남아 있다. 하지만 모례장자터는 말 그대로 터만 있을 뿐 건물의 흔적은 없다. 모례장자샘은 주변에 잔디를 심고, 우물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정자(井字) 모양으로 짜서 나름의 격식을 갖춰놓고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도 지정돼 있다.
고대와 신라의 구미는 광활한 낙동강을 중심으로 곡창을 이뤘고, 삼국의 교우처이자 한국 불교의 근간인 신라 불교 최초의 전래지이기도 했다. 고려로 와서는 충신 야은 길재를 낳았고, 야은의 정신은 구미를 조선 성리학의 본향이라는 놀라운 성공을 안겨다줬다. 또한 구미는 조선 낙동강 물류의 큰 거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구미의 역사적 족적은 한국 경제의 초석이자 세계로 뻗어나가는 구미라는 위상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 이종규기자 구미·정창구기자
사진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자문단: 권삼문 구미시 학예연구사 구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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