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갠 다음날 반가운 전화 한통 "선상님…"
마감 시간에 쫓기고 있는데 "선상님" 하고 전화가 올 때가 있다. 아주 반가운 전화다. 아무리 바빠도 바쁜 내색을 하지 않는다. "예, 할머니"라고 대답하면 "온 낮에 오소. 물고기 잡아 났구마." 용건은 그것으로 끝난다. "올 거냐, 안 올 거냐."그런 건 묻지 않는다.
대구에서 성주로 가는 길목인 동곡 삼거리에 '동곡할매국수집'이 있다. 그 집 주인은 내 마음의 친구인 강신조 할머니다. 논설위원으로 근무할 때 일주일에 한 번쯤 바람도 쐴 겸 들른 집이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내가 민물고기 조림을 좋아한다"니까 "장마 질 때 강물이 불으면 고기들이 도랑으로 밀고 올라오는데 우리 아들이 한 냄비씩 잡는다"고 했다.
##약한 불에 서너 시간 곤 후 양념'''
그게 인연이 되어 비 갠 다음날은 "선상님" 하는 전화가 행여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다. 할머니는 잡아온 고기들을 정갈하게 손질하여 약한 불에 서너 시간 올려놓았다가 냉장고에 보관해 둔다. 동료 서넛과 함께 "할머니" 하고 들어서면 반색을 하시며 일어선다. "날래 오소."
냄비를 꺼내 된장 조금에 고춧가루를 많이 푼 다음 쑹덩쑹덩 썬 풋고추와 칼자루로 으깬 마늘을 듬뿍 넣고 다시 끓인다. 이때 고추장은 넣지 않는다. 단맛이 받히면 고기 맛이 떨어진단다. "재피 좋아하면 좀 더 넣고." 할머니의 조림은 곰하듯 오래 끓인 탓에 뼈가 전혀 씹히지 않는다. 며느리가 "우리 어머님 부려먹는 사람은 이 손님들뿐이네" 하고 씰룩거리며 지나가면 "그래, 왜"라고 대답한다.
할머니 조림은 여태 먹어 본 것 중에 단연 최고다. 냄비 밑바닥에 대두를 깔고 조리면 나중 콩 한 개가 피라미 한 마리 값을 하지만 콩은 넣지 않아도 그만이다. 재료는 피라미와 붕어가 주종이지만 때론 큰물미꾸리와 모래무지도 섞여 있어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문집 조림은 먼저 피라미를 기름에 튀긴 다음 프라이팬에 가지런히 배열한 후 고추장을 주로 한 양념을 끼얹어 다시 한 번 익힌 것이다. 바싹바싹하게 씹히는 맛은 있어도 전통으로 내려온 민물고기 조림과는 맛에서 차이가 난다.
"할머니. 내일 투망질을 갈 참인데 튀김은 어떻게 해야 맛이 있나요." 행여 부러 한 말인데 할머니는 신이 난다. "피라미 튀김에는 밀가루를 많이 쓰면 못 써. 밀가루 푼 물에 고기를 살짝 적셔낸 다음 생 밀가루를 그냥 뿌리소. 고기를 들깻잎에 도르르 말아 반으로 자른 이쑤시개를 꽂고 밀가루 푼 물에 다시 한 번 굴려 튀김을 하면 들깻잎과 피라미 맛이 어울려 먹을 만하지요. 내 시키는 대로 그래 하소."
할머니의 솜씨는 요리 강사 수준이다. 타고난 손맛만 출중한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의 이론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이 집 국수는 멸치 우려낸 물에 국수를 말지 않는다. 국수를 끓여낸 제물에 국수를 만다. 다만 그 국물의 온도를 여름엔 차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할 뿐이다. 그렇게 해야 담백하면서도 감칠맛이 난다는 것이다.
##피라미'붕어 주종'''때론 큰물미꾸리도
할머니는 연간 대여섯 말의 국산 콩으로 장을 담근다. 국수 위에 별다른 고명은 얹지 않고 파 마늘 풋고추를 넣은 조선간장만 찔끔 부어도 맛은 저절로 난다. 치장과 가식이 무용하다는 걸 이 집 국수에게서 배우면 틀림없다. 여인으로 치면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이지만 기품이 서려있다.
할머니는 일흔둘의 나이로 십여 년 전에 홍두깨를 둘러메고 저승으로 가셨다. 이승에서의 "선상님" 하는 전화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지만 저승에서도 "선상님" 하고 나를 부를까봐 괜히 무섭고 두렵다. 언젠가는 저승 강에서 잡은 피라미 조림을 맛보게 되긴 되겠지만 그래도 말이야. 허 참.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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