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동양학 이야기] 세종시 문제와 역대 수도 천도의 목적

입력 2009-11-07 16:05:46

정조 "백성에게 도읍 옮길 이유 밝혀야"

충청남도 연기군 일대의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 수정안 문제로 찬반논란의 갑론을박(甲論乙駁)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세종시 문제를 보면서 우리는 역대 수도 천도 문제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역사상 수도 천도는 여러 번 있었고 국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삼국시대를 보면 고구려는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의 천도가 있었다.

이 가운데 427년 장수왕의 평양천도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 재위)과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3)때 다져진 국력강화에 장수왕(長壽王·413~491)의 평양천도는 귀족세력의 견제와 왕권강화 및 백제·신라를 정복하기 위한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평양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만약에 국내성에서 평양이 아닌 만주의 중심지인 심양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졌으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제는 지금의 한강지역 서울인 위례성에서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475년 문주왕(文周王·475~477) 때 충남 공주(웅진)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후 다시 6세기 성왕(聖王·523~554) 재위시에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여 왕권강화의 중흥을 꾀했다. 무왕(武王·600~641)때 귀족세력의 재편을 통한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미륵사를 창건하고, 부여에서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한편 신라는 통일 후에 신문왕때 달구벌(대구)로 수도이전 계획이 있었으나 경주가 천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 대신 경주가 국토의 한쪽에 치우친 보완책으로 지방에 5소경(원주·충주·청주·남원·김해)을 설치하여 지방의 균형발전을 도모했다. 이 당시 만약에 통일신라가 경주에서 한반도의 중심지인 서울이나 대전 근방으로 천도했다면 신라의 운명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911년 후고구려의 궁예는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봉국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고려시대는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에 따른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한 시기이다. 처음에는 서경길지설(西京吉地說)이 유행하다가 문종 이후에는 지금의 서울인 남경길지설(南京吉地說)이 대두되었다. 고려 3대 임금인 정종은 서경 천도를 실행에 옮겼으나 병이 들어 세상을 뜨자 이 일은 곧 중지되었다.'고려사'에 의하면 정종의 서경 천도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호응받지 못한 채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광종(光宗·949~975)이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로 부르게 하여 서경을 중시하였다.

숙종 원년(1096) 김위제는'도선비기(道詵秘記)'에 따라 삼경(三京)을 둘 것과 남경 천도(遷都)를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숙종은 '남경개창도감'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3년 후 남경의 궁궐을 완성함으로써 남경 건설은 마무리되었다. 남경 건설의 원래 의도는 국왕의 권력 강화와 함께 상업과 무역을 일으켜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숙종의 남경 건설은 수원을 건설했던 조선 정조의 의도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수원성을 건설했던 정조의 한마디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천도는 무엇보다 백성을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도읍을 옮길 때는 옛 도읍에서 살 수 없는 이유와 새 도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백성들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정수도는 통일 후를 반드시 고려하여 실행해야 한다고 본다.

혜명동양학연구원(http://cafe.daum.net/hyem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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