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여행] 살찐 붕어나 낚아볼까

입력 2009-11-07 07:00:00

한자 대물이 아니면 어떠랴, 무심의 경지서 세월이 낚이는 걸…

가을이 깊어져 조사들은 올해 출조를 마무리하고 낚시 채비를 갈무리할 때가 되었다. 조우회들이 납회를 하는 이즈음에는 대물도 잘 터진다며 이때를 노려 출조하는 조사들도 적지않다.
가을이 깊어져 조사들은 올해 출조를 마무리하고 낚시 채비를 갈무리할 때가 되었다. 조우회들이 납회를 하는 이즈음에는 대물도 잘 터진다며 이때를 노려 출조하는 조사들도 적지않다.
낚시에 걸려 나온 일곱치 남짓 살찐 붕어.
낚시에 걸려 나온 일곱치 남짓 살찐 붕어.
늦가을 뒤늦게 저수지에 핀 노랑어리연꽃.
늦가을 뒤늦게 저수지에 핀 노랑어리연꽃.
연못에서 시들어가는 연잎과 연밥.
연못에서 시들어가는 연잎과 연밥.

곧 달이 뜨려는가. 삿갓에 미투리를 신고 바짓단을 걷어붙인 채 갈대밭 사이를 허적허적 걷는 영감은 갓 물가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눈을 아래로 지그시 내려 감은 채 한쪽 어깨에는 낚싯대를 둘러메고, 한 손에는 살진 붕어 서너 마리를 꿰어 들었다. "허허, 오늘은 조과가 괜찮은 편이었어." 저 혼자 즐거운 영감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가. 조선시대 선조 때 화가 이숭효의 '귀어도'(歸漁圖)이다.

가을은 저물고 이제 살이 오를 대로 오른 붕어들은 곧 물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 낚시꾼들도 이제 납회만 갔다가 채비를 갈무리하리라 마음먹을 터. 그나마 기온이 더 떨어지기 전에 살진 붕어 낚으러 나섰다.

◇기다려라 붕어야! 내가 간다

오후 햇볕이 많이 기울어 그림자를 길게 끈다. 소슬바람이 부는데 낚시가 되려나? 아니지. 이럴 때 대물을 노릴 만하지. 이제 달도 기울어 밤낚시 분위기도 무르익는데 막바지 입심 좋은 붕어 손맛을 보지 않을 수 없잖은가.

하긴 요즘 같은 때는 기온이 떨어져 강이나 수로 쪽으로 가야 그런대로 손맛을 볼 텐데. 창녕이나 남지 쪽으로 방향을 잡기에는 품이 너무 많이 들고 아쉬운 대로 청도 쪽 저수지로 방향을 잡는다. 설마 내가 잡을 붕어야 있겠지.

미끼는 글루텐(떡밥 미끼의 일종)과 생새우, 옥수수에 콩을 준비한다. 딸기향이 나는 글루텐은 해가 지기 전 낮 동안 넣어 집어 효과를 노릴 요량이다. 저녁에는 콩과 생새우, 옥수수와 생새우 짝밥으로 한번 노려볼 참. 밤이 깊으면 그 중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바꾸면 될 터이고….

낚싯방에서 미끼를 사고 채비를 보완하는 동안 낚시질 풍경이 선하게 그려진다. 요즘 날이 가물어 어떨지 조금 걱정이 되지만, 지난번 쏠쏠하게 재미 본 저수지를 작정한다. 저수지에는 물풀, 마름이 약간 떠있을 것이고 가장자리에는 마른 수초가 제법 깔렸을 것이다. 한 칸 반 대는 수초 쪽으로 바짝 붙여 담그고 세 칸 대는 마름을 넘어 던질 참이다.

어차피 장기전을 각오한 바, 옷은 이미 두툼하게 껴입었고, 먹을 것만 넉넉히 준비하면 된다. 보온물통에 따뜻한 물, 일회용 커피는 있으니 김밥에 우유가 있어야 한다. 체력을 보충하려면 영양갱도 두엇 챙겨 넣고 밤참으로 먹을 컵라면은 빠뜨리면 안 된다.

차를 몰아가는 동안 언뜻 스치는 생각. 만약 내가 늘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차고앉았으면 어쩐다. 그러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내 자리를 차고앉은 조사(釣師)가 살림망이 묵직하도록 붕어를 건져뒀으면 그 꼴을 어떻게 봐주지. 마음이 급해진다. 금세 바늘을 물고 달려 나오는 노란 토종붕어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운전대를 잡은 팔에 힘이 불끈 들어간다. 기다려라 붕어야. 오늘 온 못 고기 내가 다 잡을 참이다.

서둘러 나선 덕분에 아직 해는 넉넉히 남아있다. 차를 저수지 둑 아래 공터에 세우고 우선 '물때'를 살피러 나섰다. 저수지 둘레에는 드문드문 조사들이 앉아, 낚싯대 두어 대씩 담가놓고, 세월을 낚고 있다. 저수지를 삥 돌아가며 분위기를 살피니 살림망을 물에 담근 조사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가뭄에 저수지 물은 많이 줄었고 물 가장자리에는 마름이 빼곡하다. 세 칸 대를 던져도 마름 너머로 낚싯줄을 드리우기 어려울 정도. 이럴 양이면 밤낚시는 글렀다.

지난번 밤낚시 때는 수량도 풍부해서 낚시 의자 놓기도 맞춤하고 붕어 입질도 솔찮게 들어왔는데. 아쉽지만 할 수 없는 일. 지체 없이 제2 목표 지점을 향해 차를 돌린다. 두 번째 낚시터는 걱정했던 만큼 물이 빠지지 않고 물빛도 맑다. 마침 지난번에 앉았던 옆 자리에 한 조사가 막 채비를 거두는 중이다. 조과가 어땠는지 넌지시 물었더니 잔챙이 입질은 간혹 들어온단다. 옳거니, 낮에 잔챙이 입질이 있으면 분명 밤에 '놈'(대물, 한 자짜리 이상 붕어)들이 움직일 터이다.

◇붕어낚시에는 '달관과 관조'가

바삐 받침대를 꽂고 찌맞춤을 한다. 낚싯대는 늘 하던 대로 석 대만 '깐다.' 낚시꾼 중에는 한 칸 반 대부터 다섯 칸짜리까지 일곱, 여덟 대를 진열하듯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다. 그것은 욕심만 앞선 '꾼'들이나 하는 낚시. 하기야 일곱, 여덟 대 들낚시도 모자라 덤으로 릴낚시 두어 대 더 던져 놓고 앉은 사람도 있다. 그것은 낚시라기보다 어로 행위일 것이며, 낚시꾼이라기보다 어부 쪽에 더 가깝다.

붕어 낚시는 들낚시 두어 대 걸어놓고 붕어와 한판 승부를 거는 것만이 조사다운 낚시법이다. 이 때문에 붕어 낚시에는 '유희'라기보다 '달관과 관조'의 미학이 깃들어 있다. 초보 낚시꾼이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고 낚싯대를 난전처럼 벌여 놓는다면, 관록이 붙을수록 낚싯대를 한 대씩 접어 넣는 것이 붕어낚시의 진정한 미덕이다. 마치 젊은 시절 일을 잔뜩 벌이다가 나이가 들수록 일을 줄이고 대신 깊이 천착하는 것, 달관,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또 초보시절 낚싯대를 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부산을 떤다. 그러나 고수들은 낚싯대를 드리워두고 가만히 수면을 응시한다. 무심의 경지에서 세월을 낚는 것, 관조의 다름이 아닐 터이다.

찌가 숨을 할딱이듯 잔잔한 수면 위로 끄트머리만 내밀고 있다. 이제 밥 한 뜸 들일 시간이면 태양은 서산 너머로 기울 것이다. 석양빛을 받아 더욱 빨개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낚싯대 끝에서 앉았다 날아올랐다 장난질하고 있다. 아마 물밑에서도 글루텐 향기를 맡고 몰려든 물고기들이 바늘 주위를 맴돌며 장난질을 칠 것이다. 피라미들은 급하게 오락가락할 것이고, 버들치는 흘러내린 밑밥에 대가리를 들이박고, 붕어는 멀찌감치 떨어져 입만 뻐끔거리고 있을 것이다.

담배 한 대 태울 시간이 지나고 다시 낚싯대를 건져내 글루텐 밑밥을 달아 던진다. 이번에는 꼭 넣었던 자리에 다시 낚시를 던져 넣어야 모인 붕어들이 분산되지 않을 것이다. 수년 전 붕어낚시 달인 조사가 가르쳐줬다.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똑같은 자리에 미끼만 투척할 수 있으면 한겨울에도 붕어를 낚아낼 수 있다고. 한겨울 살얼음 언 저수지 못 둑 위에서 그 영감님은 실제 증명해보였다.

이제 잔챙이 붕어뿐만 아니라 중치들도 밑밥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피라미들이 설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물에 잠긴 찌 근방에서 작은 기포가 두어 방울 올라온다. 찌가 약간 옆으로 흔들리는 꼴이 잔챙이들이 낚싯줄을 건드렸나 보다. 아직 옳은 녀석들을 꼬드기려면 몇 번 더 밑밥질하듯 글루텐을 달아 던져야 한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다. 가을 저녁은 해가 빠지면 빨리 어두워진다. 어둡기 전에 야간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캐미라이트(찌에 꽂는 밤낚시용 발광체)를 달고 부착용 플래시를 모자에 붙인다. 일찌감치 김밥을 먹어둘까.

어라. 이게 뭔가. 갑자기 찌가 물밑으로 잠긴다. 일단 '히팅'. 낚싯대 끝이 약간 휘는 게 뭔가가 걸리긴 걸린 모양이다. 그렇지만 손에 전해지는 저항은 거의 없다. 조용하게 달려 나오는 녀석. 그러면 그렇지. 손가락만 한 버들치. 어쩐지 찌가 아래로 빠진다 했지.

붕어가 바늘에 걸리면 십중팔구는 찌가 위로 솟구친다. 그에 비해 버들치나 잡어들이 물면 대부분 찌가 물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것은 붕어들은 바닥에 가라앉은 먹이를 '훅' 빨기 때문에 추가 들어 올려져 찌가 치솟는다고 낚싯방 주인이 가르쳐줬다. 그렇다면 찌가 가라앉는 잡어들은 먹이를 바로 삼켜서 달아나버리기 때문인가. 고수 조사를 자칭하면서도 아직 물고기들이 물속에서 하는 짓들이 어떠한지 도무지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숨막히는 절정감, 어찌 잊겠는가

이제 해가 빠지면 잡어들은 달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이런 저수지는 블루길이 없어서 다행이다. 블루길이 있는 못은 아예 붕어낚시를 못한다. 육식성이라는 블루길이 낮시간 동안은 식물성인 콩까지 물고 늘어지는 판이다. 갈수록 온전한 붕어낚시를 할 곳이 줄어든다. 아쉽다.

이제 밤이 깊어간다. 건너편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도 잦아들고 달빛은 한결 더 창백해진다. 간간이 불어오는 찬바람에 목덜미가 서늘하다. 낚시의 대선배 월산대군께서 읊으셨나. '추강에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저수지에 낚시 드리워도 고기 아니 무는구나. 이러다가 오늘 저녁 붕어 대면이나 하겠나. 에라 쌀쌀한데 커피나 한 잔 할까.

이 무슨 '머피의 법칙'. 앉았을 때는 찌가 꿈쩍도 않다가 꼭 엉덩이 떼면 입질이 오니. 세 칸 대, 깜빡이던 캐미라이트가 일순 '푹' 솟구쳤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잠잠하다. 어찌 된 건가. 낚시를 건져보니 새우는 수염만 몽그라져 있고 옥수수는 그대로이다. 이 녀석들이 심심해서 한 번 삼켰다 뱉은 게로구나. 그래 슬슬 입질이 온다 이거지. 가슴이 가볍게 쿵쾅거린다.

일단 다시 미끼를 손질해 담그고 커피 한 잔. 달빛 아래 먼 산은 안개에 싸였는지 희미하고 밤새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 그 향이 허파꽈리 깊숙이 스며든다. 쪼그리고 앉았더니 무릎이 시리고 아프다. 옛 어른들 밤이슬 맞으면 뼈 상한다고 했는데, 뭔 먹고 살 일한다고 이 청승인가.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캐미라이트 불빛이 눈앞에 어른거릴 것이다.

커피잔을 챙겨 넣고 다시 정좌한 지 20여분 지났을까. 물가 가까이 마른 수초 옆에 붙인 한 칸 반 대 캐미라이트가 까닥까닥 흔들리다 멈칫, 다시 불쑥 밀려 올라온다. '히팅'. 얕은 물 위를 파닥대는 소리에 소란스럽다. 플래시 불빛에 비춰보니 세 치(寸) 남짓한 잔챙이. 그나마 손맛은 봤네. 좀 더 먹고 무럭무럭 커야지. 가거라. 녀석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급히 꼬리쳐 달아난다.

다시 정적. 어신이 올 때는 연이어 올 것 같은 기대감에 신경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10분, 20분이 지나면 역시 '아닌가벼'이다. 날은 춥고 캐미라이트는 꼼짝을 않고, 이걸 걷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깊어진다.

어차차. 세 칸 대 캐미라이트가 움찔거린다. 그래, 그럼 그렇지, 올 것이 왔구나.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가만히 낚싯대를 잡는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뻣뻣해진다. 한 번, 두 번, 까닥까닥. 옆으로 한 번 움찔. 그러더니 쭈~욱 밀어 올린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히팅을 할까. 아니지 좀 더 좀 더. 쭉~쭉·쭉 올라온다. 마치 진득진득한 연못 속에서 연뿌리가 뽑혀 올라오듯 천천히 천천히 찌가 뽑혀 올라온다. 숨이 턱턱 막힌다. "흡, 흡" 절정이다.

낚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추운 날 무슨 낚시'라며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이 숨 막히는 '오르가슴'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하루 저녁에 몇 번씩 오를 수도 있는 오르가슴을….

일순 눈앞이 막막해진다. 한 자(尺)나 우뚝 솟은 캐미라이트 불빛이 아득하고 흐릿하다. 눈 딱 감고 히팅. 왔구나. 세 칸 반 대는 끝이 크게 휘어지고 낚싯줄은 팽팽하다. 잠긴 한 길 반쯤의 물속에서 전해져오는 저항은 묵직하다. 아직 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옆으로 차고 나간다. '피아노 줄 소리'가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자(30㎝)'를 넘진 못했다. 대를 세우자 드디어 놈은 수면 위를 파닥거리며 끌려나온다. 반가운 마음에 낚싯줄을 잡고 얼른 마른 땅으로 튕겨낸다. 노란 토종붕어. 손에 잡히는 너비가 뿌듯하다. 여덟 치는 족하다.

숨은 헐떡거리고 가슴은 방망이질하듯 쿵쾅거린다. 진정이 안 된다. 다리까지 벌벌 떨린다. 추위 탓인가. 워낙 오래 기다렸다가 만난 녀석이라 흥분해서 그렇다고 솔직히 인정하자. 고개를 치켜들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깊이 심호흡을 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이 단 한 번의 절정감만으로도 족하다. 미련 없이 대를 걷자. 이 가을, 멋진 하룻밤 바깥바람을 쇠었다. 내년 봄이나 되어야 이 맛을 다시 볼 수 있겠지….

글·사진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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