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벗어나도 가난엔 다시 묶인다?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가 '디스트릭트9'이다. 이 영화는 SF영화가 가진 공식 몇 가지를 뒤집는다. 하나는 우주비행체가 나타난 곳이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뻔한' 무대가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라는 것, 그리고 외계생명체가 악당이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악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선이 고장 나서 꼼짝없이 지구에 불시착한 에이리언들은 요하네스버그 시내의 '디스트릭트9'(제9구역)에 격리수용된다. 에이리언들은 무식하고 식탐만 많으며 말도 잘 안 듣는 하등한 생명체로 묘사된다. 힘이 세긴 하지만 우리의 총으로 제압할 수 있는 소수자들에 불과하다. 영화는 현란한 컴퓨터그래픽과 첨단과학의 '때깔' 대신 날것의 다큐멘터리 느낌으로 '디스트릭트9'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종차별정책이 있었던 10여년 전의 남아공의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에이리언들이 격리되어 차별받는 풍경이 신기하게도 낯설지가 않다.
흑인 격리시켰던 '디스트릭트'
지금도 남아공에는 인종차별정책이 있었던 시절에 흑인들을 격리시켰던 '디스트릭트'들이 남아있다. 철책은 없어졌지만 격리구역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을 꿈꾸기에는 그곳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아직도 오래전 강제이주당한 그 구역의 허름한 집에서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간다.
인종차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가난에서는 해방되지 못한 그 '디스트릭트'들은 이제 각종 도시범죄가 난무하는 '우범지역'으로 격리되었다.
처음 남아공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 모두 내게 '가면 안 되는 구역' 몇 곳을 일러주며 단단히 주의를 준다. 꼭 가보고 싶다면 여행사투어를 통하라고 했다.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와 가난을 관광 상품으로 팔고 있는 곳(물론 관광수익 대부분도 그곳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가난의 차이'로 경계 지어지는 곳, '디스트릭트'. 이곳을 구경 가는 따위의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는 부자들이 사는 동네(주로 예전 백인 거주구역이었고 지금도 대부분 백인들이 사는)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며 그 동네 사람들이 '가도 되는 곳'이라고 정해준 안전한 구역들에만 갔다.
아직도 백인 부자촌 스스로 격리
'가면 안 되는 곳'은 흑인 거주 구역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칼라드'라고 부르는 혼혈계 인종 거주 구역 역시 위험하다고 했다. 인종차별은 없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경계했다. 같은 시대 한 도시 안에서 그들은 각각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인종차별정책이 폐지된 후 남아공의 대도시들은 세계에서 가장 글로벌한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부유한 '남아공 드림'을 꿈꾸며 모여들기 때문이다. 흑인'백인'중국인'인도인'혼혈인이, 그리고 아프리카대륙의 온갖 다양한 부족들이, 그리고 세계 최초로 동성애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 나라답게 전 세계의 동성애자들이, 그리고 아프리카 정복을 꿈꾸는 전 세계 여행자들이, 그 모두가 뒤섞여 살아가는 곳이 바로 남아공이다. 그러나 어떻게? 서로를 경계하면서 각자의 '삶의 디스트릭트'를 만들고, 그 디스트릭트를 더욱 더 격리시키며 살아간다. 나와 다르다는 건 '알 수 없는 위험'이며, '내 삶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나와 다르다'는 건 경계의 대상이며 '얼마나 나와 다른가'는 경계의 기준이다.
그것이 바로 그곳에서의 삶의 법칙. 남아공에서 나는 그곳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여행의 법칙을 위반했다. 여행이라는 것이 나와 다른 것들을 발견하고 그 차이를 긍정하고 그래서 세상을 좀 더 다르게 보는 새로운 시선을 창조하는 행위가 아닌가. 나는 그곳에서 백인보다는 칼라드를, 칼라드보다는 흑인을, 조금이라도 더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사실 이런 '경계의 폭력'은 지금 평범한 일상 속의 나에게서도 목격된다. '대유행'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신종플루, 도대체 감기와 어떻게 다르며 얼마나 더 지독한 병이라는 것인지,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병이기에 전 세계가 벌벌 떨어야 하는 건지, 그 정체가 뭔지 몰라서 더 무서운 그 전염병이 바로 우리 곁으로 무서운 속도(얼마나 무서운 속도인지조차 정확히 알 수가 없다)로 '마구' 쳐들어오고 있다. 마치 에이리언처럼 말이다. "다 모르겠고 그 거 걸리면 죽는다는 건 알겠어." 다른 아무런 정보도 알려지지 않고 단지 위험하다는 정보 한 가지만 알려진 어떤 것. 그래서 우리의 대응 방법도 단 한 가지다. 무조건 피하거나 막는다. 에이리언들을 격리수용하듯이 신종플루 자체를 격리수용한다. 혹은 신종플루로부터 나를 격리수용한다. 그래서 나도 요즘 즐겨 찾던 시립도서관에 발길을 끊었다. 오픈 테이블의 맞은편 아저씨가 기침만 해도, 아니 실은 하품만 해도 저절로 신경이 곤두선다. 마스크를 쓴 사람이 거리에서 스쳐 지나기만 해도 '혹시 신종플루 걸린 사람이 밖에 나온 거 아냐?'라는, 괜한 경계심이 발동한다. 아마 내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상대편이 같은 경계의 각을 세울 것이다.
신종플루 덕에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디스트릭트9'이 생겼다. 신종플루 걸린 사람들, 걸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걸린 듯이 보이는 사람들, 그들 모두를 우리는 잠재적 디스트릭트9에 가두어야만 안심이 된다. 2009년 가을은 참 쓸쓸하다.
미노〈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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