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월] 사무기 영업 40년 외길 서용갑씨

입력 2009-11-03 11:06:52

1960년대 필기구 총아 '볼펜' 등장…철필·잉크 서랍 속으로

서용갑씨가 경상북도 교육청 앞 은행나무 앞에서 도청 이전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서용갑씨가 경상북도 교육청 앞 은행나무 앞에서 도청 이전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1964년 국내 최초의 복사기 RICOPY 555.
1964년 국내 최초의 복사기 RICOPY 555.

서용갑(61·한국후지제록스 현대사무기 대표)씨는 만년필과 볼펜, 타자기와 복사기를 팔아 처자식을 부양하고 동생 6남매를 공부시켰다. 볼펜과 만년필이라니,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경제규모가 작아 보이지만 40년 전만 해도 볼펜과 만년필은 가장 중요한 사무용품이었다.

서씨는 1967년 사무기 전문점 '지구사'(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옆에 있었다)에 취직한 이래 40여년 동안 사무용품을 취급하고 있다. 영업사원에서 출발해 지금은 종업원 6명을 둔 어엿한 사무기 상사 대표다. 요즘은 복사기와 컴퓨터가 주요 판매품이다.

◇볼펜 등장으로 철필 사라져

그가 '지구사'에 취직했을 당시만 해도 관공서에서는 철필(잉크를 묻혀 쓰는)이나 만년필을 썼다. 당시 공무원들의 글씨는 반듯반듯하고 힘찼다. 당시에는 글씨 잘 쓰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펜글씨를 배웠다. 특히 상업계 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펜글씨는 기본이었다. 요즘은 모두 컴퓨터 자판을 치니 누구 글씨가 어떤지 알 수 없고, 글씨 잘 쓰려고 애쓰는 사람도 드물다.

서씨는 평생 영업사원이었다. 주 영업장소는 경상북도 도청, 경찰청, 법원, 교육청 등이었다. 버스가 드문 시절이었고, 그나마 있는 버스도 도로 사정으로 빙빙 둘러 다녔다. 그래서 서씨는 주로 걸어서 다녔다.

40여년 사무기만 취급하다 보니 서씨는 현대 우리나라의 사무기 역사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다. 40년 전 관공서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으레 한두병의 잉크와 서너자루 철필이 굴러다녔다. 잉크를 찍어 쓰다 보니 옷이나 손에 잉크가 묻은 사람들도 흔했다.

볼펜의 대명사로 알려진 모나미 153볼펜은 1963년 5월 1일에 탄생했는데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1965년이었다. 당시 소비자들에게 모나미 153볼펜은 충격이었다. 품질로 따지자면 요즘 볼펜과 비교할 수 없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볼이 안 굴러 글씨가 안 써졌다. 마음이 급한 사람들은 촛불이나 라이터 불에 촉을 달구어 쓰기도 했다. 그런 불편을 감안하더라도 철필이나 만년필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편리한 필기구였다.

볼펜이 등장하자 책상 위에서 철필이 사라졌다. 잉크병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손에 묻거나 엎질러지던 잉크병이 사라지니 공무원들의 손가락과 소매도 덩달아 깔끔해졌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만년필을 고집했지만 이전의 인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만년필은 뒷방에서 '무게'를 잡는 필기구쯤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1963년에 판매가 시작된 '모나미 153 볼펜'의 모나미(MonAmi)는 불어로 Mon(몽:나의)과 Ami(아미:친구)의 합성어로 '내 친구'라는 뜻이었다. 모나미 볼펜이 인기를 끌자 '짝퉁' 볼펜이 나와 소비자들이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이 짝퉁 볼펜은 외형이 모나미 볼펜과 똑같은데 영문표기만 몬나니(Monnani), 모라니(Morani) 등으로 달랐다.

타자기는 1960년대 국내에 등장했으나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서씨에 따르면 타자기의 전성기는 1975년∼80년대 초였다. 상고를 졸업한 사람은 타자를 잘 치고 주산을 잘하는 것만으로 취직이 보장됐다. 당시 상고 학생들에게 주산과 타자는 필수였다.

탁탁탁 소리 내며 한 글자 한 글자 찍어가는 타자기는 요즘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쓰는 곳이 있다. 종이로 된 각 관공서의 인사기록 카드는 여전히 타자로 한 글자 한 글자 기록한다.

1975년 무렵 이미 수동식 계산기가 보급됐지만 보편화되지 않았다. 계산기는 주판 앞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른바 손바닥만 한 '카시오' 계산기가 등장하면서 주판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일자리 많고 역동적이던 시절

세월 따라 변한 것은 사무용품이나 사무기기뿐만 아니다. 직장에 대한 인식, 공부에 관한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서씨는 관청을 판매처로 삼다 보니 아는 사람들도 모두 관청 사람들이었다. 제10대 김인 경북도지사 시절(1963~1967)부터 도청을 '출입'했으니 40년이 넘었다. 당시 경북도청은 지금의 경상감영공원(대구시 중구 포정동) 자리에 있었다.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은 1966년이다.

그의 성실성을 높이 사 "볼펜 장사 치우고 공무원 돼라"고 말하던 공무원들도 있었다. 허투루 지나가는 말만은 아니었다. 1960, 70년대에만 해도 임시직으로 공무원이 됐다가 정규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공무원보다 나는 뛰어다니는 직업이 좋았어요. 공무원보다 벌이도 나았고요."

요즘 세월에는 공무원이 최고 직업이지만 70, 80년대까지는 사람들의 인식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

"요새는 대학 나와도 취직할 데가 없잖아요. 나는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는데 당시에는 고교 졸업장 하나면 어디든 취직할 수 있었어요. 세상이 막 커지는 시절이었으니까 대학 안 나와도 일할 곳이 많았지요. 요즘은 박사 학위를 갖고도 취직이 어렵다니 원."

사람 사이의 인정도 많이 변했다.

"지구사에 취직하고 2, 3년쯤 지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사장 부인이 제게 장례비로 쓰라며 30만원을 주셨어요. 큰돈이었죠.(당시 경북대학교 등록금이 4만원 안팎, 학교 근처 하숙비가 한달 8천원이던 무렵이다.) 좋은 세월이고 고마운 세월이었어요.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고, 돈이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절이었거든요. 지금은 돈을 위해 사람들이 죽어라 뛰어다니지만."

◇돈 욕심 없으니 행복

서씨는 오래 한 우물을 팠지만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7남매의 맏이로 6명의 동생 뒷바라지를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 특별히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렵게 번 돈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쌀이 필요한 곳엔 쌀을, 돈이 필요한 곳엔 돈을 보태주었다.

"돈에 욕심내서 뭐 하려고요. 그저 이래 묵고 살면 되는 거지요. 욕심 부리는 사람치고 잘 되는 사람 못 봤어요. 돈을 벌면 80%는 써야 해요. 그래야 나도 살고 남들도 살지요. 내가 번 돈이라고 내가 다 움켜쥐려 들면 다 같이 망해요."

서씨는 사무용품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고 경북도청이 있던 자리도 변했는데, 여전한 것은 은행나무라고 했다. 경북도청과 경북도교육청 앞에 있는 우람하고 잘생긴 은행나무 4그루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도청과 도교육청 앞에 각각 2그루씩 서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들은 이전 경북도청(현재의 경상감영공원)에서 이식해온 것이다. 모두 수나무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줄기와 가지가 인상적이다.

"경북도청이 안동·예천으로 옮겨간다지요. 이번에도 이 은행나무들이 따라갈 것인지 지켜봐야지요."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 박스-복사기의 역사

빽빽한 글씨를 다시 쓸 필요 없이 단번에 쓰윽 베껴주는 복사기는 30, 40년 전 소비자들에게는 기가 막히는 제품이었다.

복사기는 1837년 프랑스의 다게르가 은판(銀版) 위에 물체의 모습을 고정시키는 사진술을 발명한 때부터 시작됐다. 1938년 10월 미국의 C. 칼슨이 정전식(靜電式) 복사기를 발명했고, 상품화를 이룬 것은 할로이드가 1950년에 제록스 1호기를 생산하면서부터다.

1959년 9월 자동고속복사기 '제록스 914'가 개발되면서부터 복사기는 대중화됐다. 한국에 복사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 신도교역(지금의 신도리코)이 일본 리코(Ricoh Company, Ltd.)에서 들여온 것으로, 서울 명동 미우만백화점(지금의 미도파백화점)에 설치했다. 당시 승용차 한대 값이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만든 복사기는 1964년 12월 신도리코에서 제작한 다이아조식 복사기 RICOPY-555(사진 1)이다. 'RICOPY-555 복사기'는 일반에 많이 판매되지는 않았다. 보통 용지가 아니라 화학약품이 칠해진 복사용지를 사용하는 제품이었다.

1969년 국내 최초의 전자식 복사기인 BS-1(사진2) 역시 화학약품이 칠해진 복사용지를 사용하는 제품이었다. 보통 종이로는 복사할 수 없었다. 1975년 등장한 '복사기 DT1200'(사진3)은 보통 용지로 복사하는 최초의 제품이었다. 그러나 현재처럼 가루 먹이 아니라 화학 약품을 먹으로 썼다. 요즘 복사기와 달리 냄새가 많이 나는 단점이 있었다. 한편 국내에는 신도리코, 롯데, 제록스 3사가 대표적인 복사기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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