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계집애가 한국무용 대표, 쉽진 않았죠" 최정임씨

입력 2009-11-02 14:48:33

정동극장 예술감독 한국무용가

정동극장 최정임(맨 왼쪽) 예술감독이 지난달 29일 서울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정동극장 최정임(맨 왼쪽) 예술감독이 지난달 29일 서울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한국 문화의 밤' 행사 공연을 위해 마지막 리허설 지도를 하고 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스산한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면 문득 떠오르는 노래, 가수 이문세씨의 '광화문 연가' 노랫말이다. 서울시의 '걷고 싶은 거리' 1호이기도 한 정동길이 사랑받는 건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재단법인 정동극장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를 복원한 정동극장에서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한국무용가 최정임(55)씨는 그래서인지 자부심이 넘쳐났다. "1997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저희 극장의 상설 한국형 뮤지컬 '미소' 공연에는 외국인이 관객 90%를 차지합니다. 화려한 한국무용과 기악 연주, 풍물놀이, 판소리가 어우러진 게 외국인들을 매료시킨 것 같습니다. 내년부터는 새로운 버전인 '춘향연가'를 선보일 예정인데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 문화상품이 되도록 할 생각이에요."

대학교수보다 더 인기가 좋았다는 국립무용단에서 주연 무용수로 20년을 보낸 그는 "무용이 마약과 같았다"고 했다. 경주여고 재학때 시작한 춤을 평생 하고 있지만 아직도 하루만 쉬면 불안하다고도 했다. 올 초 취임한 뒤에도 휴일은 보름뿐이었을 정도라고.

"밑에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살아남으려면 오로지 연습밖에 없었죠. 새벽에 후배보다 먼저 나와 연습하고, 한밤에는 퇴근하는 척 나간 뒤에 다시 연습실로 돌아온 날이 셀 수조차 없습니다. 덕분에 발 모양이 삐뚤어져 맨발로 돌아다니지도 못하지만…."

그에게 무용은 아픔이기도 했다. 경주 최부자의 후손으로 완고하기만 했던 선친을 속여가면서까지 무용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주에는 무용학원이 없어 몰래 포항까지 다녔어요. 대학에 들어갈 땐 가정학과에 합격했다고 거짓말했죠. 대학 1학년때 돌아가신 아버지께 춤추는 모습을 못 보여 드린 게 한으로 남았습니다."

'오셀로' '하얀 초상' '그 하늘 그 북소리' '황혼의 노래' 등에서 주로 공주, 왕비를 맡았던 그는 스스로 생각하면 '무수리과(科)'라고 했다. 치맛단이 튿어질 정도로 덜렁대 바지만 입고 목소리도 커 '삐삐', '왈가닥 루시'가 별명이라고. 공연 지도할 때도 매섭게 몰아쳐 단원들이 모두 도망간다며 웃었다.

그는 또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국립무용단의 전성기 시절에 활동하면서 대학 은사였던 송범 국립무용단 단장을 비롯해 강선영, 김백봉, 김문숙, 최현 등 국내 최정상급 유명 무용가를 사사할 수 있었다는 것.

"저같은 시골 출신 계집애가 대한민국을 대표해 외국에 친선사절로 가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무용은 참 힘든 직업입니다. 저는 아직 미혼이지만 만약 결혼해서 딸이 있었더라면 무용을 안 시켰을 겁니다. 극소수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다른 예술분야에 비해 경제적 보상도 적지요."

경주 천북면에서 태어나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단에서 섰던 그의 마지막 꿈은 당연스레 '신라'로 귀착됐다. "인생의 정리단계에 접어들면서 뭔가 예술계를 위해 조그만 일이라도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다시 왔지만 제 뿌리는 당연히 경주이지요. 고문헌에 기록만 남아있는 신라 춤을 재창조해서 정말 천년고도다운 볼거리를 만드는 게 소원입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한국 문화의 밤' 행사 공연을 위해 마지막 리허설 지도에 나선 최 감독의 이마에는 어느새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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