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여행을 떠나자

입력 2009-10-23 10:55:03

인류에게 '여행'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먹을거리와 마실거리, 그리고 안전한 잠자리를 위해 이동하던 것이 아마도 최초의 여행이었을 것이다. 삶을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던 불가항력적인 여행은 현대인의 삶에서도 어쩌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히려 의식주는 쉽사리 해결하는 듯 보이지만 원초적인 삶을 살던 시절보다 훨씬 치열한 '삶의 전투'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려 자신의 페이스를 놓쳐 버리거나, 언제나 '1등'만이 살아남는 현실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다 보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유, 웃음, 그리고 행복. 작은 것에서부터 나타나는 큰 능력과 디테일이 중시되고 있는 요즘, 여행을 통해 우리는 그것들을 발견하기도, 찾아내기도 할 것이다. 가족과 친구와 함께 빈 마음으로 떠나 하나 가득 풍성하게 채워 올 수 있는 여행. 이 가을, 행복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기에 너무나 좋지 아니한가!

브라질 출신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국내에서 인기몰이를 하면서 글의 무대가 되었던 스페인의 '산티아고로 가는 길'(Camino de Santiago) 또한 국내에서 이목을 끌고 있다.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가톨릭 3대 성지로 꼽히는 이 길을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을 넘고 포장조차 되지 않은 흙길을 걷는 자발적 고행 속에서, 40㎏이 넘는 자신의 배낭을 인생의 무게로 여기며 걷고 또 걷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약 2천 년 전 순례자들의 행적을 좇아 삶과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기자 생활의 말년에 '산티아고'를 다녀와 자신의 고향땅에 그 이상의 멋진 '길'을 내리라 다짐한 한 여인이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걸었던 '산티아고'에서처럼 고향땅 '제주'에 그 이상의 멋진 길을 내리라 결심한 그녀의 작은 발걸음은 '제주올레'라는 책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이제는 대한민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제주로 모이도록 하고 있다. 지금 당장 오랜 시간을 들여 스페인으로 떠나긴 힘들더라도 아름다운 바다와 산, 바람과 함께하며 신이 주신 가장 근원적인 행복을 찾아 떠난 제주에서 산티아고 못지않은 내면의 풍성함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정신없이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우리나라 '제주'도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시간을 들여 항공권과 숙박할 곳을 찾고 예약하는 일조차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면 어떠한가. 우리에겐 지금 당장이라도 등산화 끈을 질끈 묶고 오를 멋진 산들이 넘치지 않는가.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발갛게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코끝 시린 바람을 마주하고 '팔공산'으로 '앞산'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도심을 바라보며 새로이 충전되는 기분도 만끽하고 무엇보다 가을이 주는 풍성함을 가득 담아오면 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나'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을 허락하기도 하고, 실패를 경험하고 떠나는 여행에서는 이 세상 누구도 말해 줄 수 없던 교훈을 '나'에게 허락하기도 한다. 그뿐이다. 무언가 거창할 것 없는 그것이 여행이다.

이제는 떠나는 일만 남은 듯하다. 12월의 한파만큼이나 시리고 매서운 '인생의 겨울'이 성큼 다가오기 전에 그것을 상대할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라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날마다의 인생이 고되고 급히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나 자신만큼 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휴대폰은 잠시 꺼놓게 되더라도, 아이들의 학원을 며칠 쉬어야 하더라도 가족과 친구 사이에서 소통하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찾아 지금 출발하자. 가끔은 차디찬 이성보다 따뜻한 감성이 인생에 더 큰 힘이 되는 법이므로.

배성혁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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