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작리뷰] '호우시절' - 감독 허진호

입력 2009-10-10 08:30:00

담담한 男과 女, 허진호표 멜로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의 감독 허진호가 '호우시절'로 돌아왔다. 제목은 시인 두보의 시구절 중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 즉 '좋은 비는 그 때를 알고 내리니'에서 따왔다. 사랑도 때가 있는 것일까? 이번 영화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영화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느낌을 주는 담백한 영화. 나름대로 후반부에 반전을 두기는 했지만 이미 중반부를 넘어가며 예상이 가능한 희미한 반전이었다. 극적인 효과에 주력하기보다는 그저 담담하게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허진호표 멜로 영화다.

◆세월은 기억을 바꾼다

못다 이룬 사랑이 애틋한 것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틋함은 추억을 남기고, 추억은 지난 사랑을 윤색한다. 세월이 흐르며 추억의 선명함은 점점 퇴색해가지만 기억 속에 남은 사랑은 점점 아름답게 채색된다. 일상에 쫓겨 살다보면 사랑의 추억은 어느새 내 마음 깊은 서랍 속에만 머문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 서랍을 꺼내보며 이렇게 읖조린다. "그 땐 정말 사랑했는데…."

건설 중장비회사 팀장인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쓰촨성 청두로 2박3일의 짧은 출장을 떠난다. 첫날 현지 지사장(김상호)은 청두의 유명 관광 명소인 두보초당으로 안내하고, 그곳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는 미국 유학 시절의 친구 메이(고원원)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못다 이룬 사랑의 추억은 두 연인에게 다르게 남아있게 마련이다. 동하와 메이가 그렇다. 몇 년에 걸친 시간의 간극은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을 다르게 했을 뿐 아니라 미국 유학시절마저 엇갈린 추억으로 남겨버렸다. 동하와 일본인 사토코가 사귀었다고 믿는 메이, 그리고 메이와 다른 유학생 벤이 사귀었다고 생각하는 동하. 과연 그 둘은 사랑했던 것일까? 한때 연인이었다기에 어색할 정도로 서먹서먹한 둘은 청두의 거리 곳곳을 거닐며 함께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서로 키스도 했었다는 동하의 말에 그런 일 없었다고 답하는 메이. 동하가 "네 머리는 기억 못할지 몰라도 네 입술은 기억하고 있을 걸"라고 말하자 메이는 대뜸 "그럼 해 봐"라고 당돌하게 말한다. 둘 사이의 추억은 자전거로 옮겨진다.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함께 타기도 했다는 동하의 말에 메이는 자전거는 탈 줄도 모른다고 한다. 마치 노래 가사의 한 대목처럼 들린다. '우린 정말 사랑하긴 했을까?' 중반부는 추억이 엇갈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간다.

◆지금 헤어지면 평생 후회할 것을

2박3일간의 출장은 끝이 난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기억의 서랍을 뒤져서 '아! 맞아. 그때 우리는 그랬지'라며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추억의 부스러기를 끄집어낸 것 외에는 달리 더 하지 못한 두 사람. 그나마 청두의 밤거리에서 만난 '때를 맞춘 빗줄기' 덕분에 두 사람은 거리의 가게 앞 처마에 서서 잠시나마 연인처럼 포옹을 한 것이 전부였다. 2박3일은 그들에게 너무 짧았던 것일까? 그저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을 보내듯이 "잘 가"라는 한 마디로 동하를 보내버린 메이.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그저 추억 부스러기뿐이 아니었다. 미국 유학시절 함께 지내며 자전거를 탔던 사진을 어렵사리 구한 동하는 메이의 휴대폰으로 전송해준다. '그래, 그때는 자전거도 탔었는데'라는 과거의 떠올림뿐 아니라 자전거라는 매개체는 둘 사이를 다시 연결해주는 사랑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워. 메이는 선물을 전해줄 것이 있다며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하에게 달려간다. 비행기 시간이 다 됐는데도 공항 커피숍에 앉아 리필을 요구하는 동하, 빨리 가라며 재촉하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눈길만 보내는 메이. 지금 필요한 것은 "그때는 사랑했는데…."가 아니라 "지금도 널 사랑해"라는 말이지만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한다. 지금 이렇게 떠나면 또 얼마나 후회하며 살 것인가. 세월이 지나고 망각의 먼지가 쌓이면 아픔도 추억도 무뎌지겠지만 그 안타깝고 애틋한 설렘을 오롯이 받아들여야만 할까? 마주 선 채 말을 잊지 못하는 두 사람. 동하가 먼저 용기를 낸다. "하루만 더 있다가 갈까?" 이제 추억찾기는 끝났다. 이들은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정우성과 고원원의 매력이 묻어난다

영화는 지극히 진부하거나 어색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고 있다. 헤어졌던 두 남녀의 만남과 추억찾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은 멜로영화가 갖고 있는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마치 관광홍보 영화 같은 청두 거리의 풍경 비추기는 관객들의 몰입도를 오히려 떨어뜨릴 수도 있다. 영화 내내 한국어 대사는 손에 꼽을 정도에 그친다. 미국 유학시절 만난 동하와 메이는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외국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 사랑을 속삭이기에는 부적합하다. 두 사람의 대화 역시 그렇다. 사실 자막으로 보여주는 한글은 두 사람이 나눈 영어 대사보다 훨씬 그럴 듯하게 포장돼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어색한 요소들을 허진호 감독은 특유의 감성적 기법으로 적절히 녹여내는데 성공했다. 청두의 거리 풍경과 쓰촨성 대지진 참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장면은 적절한 복선으로 활용했고, 두 사람의 풍요롭지 못한 사랑의 언어 표현은 오히려 서먹서먹한 둘의 사이를 보여주기에 적절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한 추억찾기였다면 오히려 느끼하기 짝이 없는 구닥다리 애정물이 됐을는지도 모른다. 조각 미남 정우성과 풋풋함이 살아있는 중국 배우 고원원의 연기도 좋았다. 정우성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손예진)를 눈물겹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남편 역할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온 '똥개'에선 망가져도 멋있다는 평을 들었다. '호우시절'에서는 정우성의 색다른 매력이 돋보인다. 정우성의 연기는 전작에 비해 훨씬 편안해졌다. 중국 배우 고원원은 한국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짧은 커트 머리가 찰랑거리는 그의 모습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다만 '호우시절'의 장점인 담백함은 자칫 심심함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중간에 조연인 김상호를 투입해 유머스런 장면을 연출했지만 전반적으로 투명한 색깔을 채우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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