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낙동·백두를 가다] (41)호국불교의 성지 김천

입력 2009-10-09 07:38:17

신라불교 발상지 직지사, 임진왜란땐 승병으로 이름떨쳐

김천 직지사는 신라불교의 요람이요, 포교의 전진기지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라는 걸출한 영웅을 배출한 호국불교의 성지다. 김천시는 현재 직지사를 호국불교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김천 직지사는 신라불교의 요람이요, 포교의 전진기지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라는 걸출한 영웅을 배출한 호국불교의 성지다. 김천시는 현재 직지사를 호국불교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직지사의 사명대사 영정. 사명대사는 직지사에서 출가했고, 불과 서른의 나이에 주지에 올랐다. 사명대사는 고승이자 석학, 그리고 외교관이기도 했다.
직지사의 사명대사 영정. 사명대사는 직지사에서 출가했고, 불과 서른의 나이에 주지에 올랐다. 사명대사는 고승이자 석학, 그리고 외교관이기도 했다.

일행은 올해 초부터 봉화를 시작으로 경북 곳곳의 역사·문화를 찾아 다녔다. 그 결과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불교다. 일행이 다닌 시·군마다 불교문화가 꽃폈고, 김천 역시도 그러했다. 김천은 신라불교의 요람이자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호국불교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는 김천의 불교를 만나기 위해 직지사로 향했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인 417년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신라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구미 해평의 도리사 창건 이듬해다. 그만큼 역사가 깊다는 의미다. 직지사의 창건설을 보면 창건주 아도화상이 구미의 도리사를 창건한 후 김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만한 훌륭한 터가 있다고 해서 '直(바를 직) 指(손가락 지)'라고 했다고 한다. 직지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527년 법흥왕 14년보다 100여년 전에 이미 창건됐다는 점에서 신라불교의 발상지이자 포교의 전진 기지인 셈이다.

직지사는 918년 고려의 건국과 함께 대중흥기를 맞는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전투에서 1만 군사 중 겨우 8천명이 전사할 만큼 대패한 뒤 구미 인동현을 거쳐 직지사 인근에까지 밀려났다. 왕건은 당시 직지사 주지인 능여조사를 만나 도움을 청했고, 왕건의 인물 됨됨이에 감복한 능여조사는 짚신 2천켤레를 삼아주고 큰 짚신을 사방에 흩어둬 후백제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왕건은 능여조사의 도움을 발판으로 전열을 재정비한 뒤 안동의 고창 전투에서 견훤군을 대파했고, 결국 후삼국을 통일했다. 후삼국의 승자 왕건은 밭 1천결(지금으로 치면 약 1천만㎡)을 직지사에 내려 은혜를 갚았고, 직지사는 고려 왕실의 보호 아래 절의 세를 더욱 키우게 됐다.

조선의 불교는 당시 '탄압'의 영순위였다. 하지만 직지사만큼은 고려 때의 위세를 유지하게 된다. 결정적 원군은 바로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의 어태(御胎)를 직지사의 북봉(뒷산)에 안치한 것이다. 직지사는 임금의 태를 묻게 됨으로써 '탄압'의 그늘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임금의 태를 보호하는 수직사찰(승려가 수직군이었고, 수직군의 수장이 주지였다)로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고, 직지사가 위치한 김산현은 김산군으로 승격까지 했다. 또 태실을 보호하기 위해 직지사 주위 30리 내에는 벌목과 사냥, 수렵도 금했다.

직지사 내에는 전각이 하나 있다. 사명각이다.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사명각은 조선 정조 11년에 지어졌고, 사명각의 현판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이다. 직지사는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고승인 사명대사를 배출한 사찰(출가·득도사찰)로도 유명하다. 직지사는 현재 임진왜란 호국불교의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사명대사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황악산 아래 유촌마을(직지사 앞 상가 일대)의 황여헌 선생(황희 정승의 증손자로 당대 석학) 문하에서 공부하다 양친을 모두 여의자 직지사로 출가했다. 당시 주지인 신묵대사의 제자가 됐고, 18세에 승과에 당당히 장원급제한 뒤 불과 서른의 나이에 직자사 주지에까지 올랐다. 사명대사와 신묵대사와의 만남 설화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신묵대사가 참선을 하던 중 꿈에 직지사 입구 천왕문 옆 은행나무에 황룡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는 깨어나 꿈에 본 장소를 가보니 한 소년이 잠을 자고 있었다. 신묵대사가 소년의 사연을 듣고 거두어 제자로 삼았는데 이 소년이 바로 사명대사였다고 한다. 당시의 은행나무는 1800년에 불타 없어졌고, 천왕문 앞 돌은 소년 사명대사가 누워 자던 돌로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사명대사는 31세에 선종의 본산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됐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의 보현사에 칩거 중인 휴정을 찾아가 교우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임란 후 3번이나 일본으로 건너가 수천명의 조선인들을 데려오는 탁월한 외교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사명대사는 종교를 떠나 당시 성리학자들과 교류했고, 당대 대유(大儒·대유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석학이기도 했다. 직지사는 임란 당시 43개 전각 중 일주문, 천불전, 사천왕문을 제외한 40개의 전각이 소실될 만큼 참사를 겪었으나 사명대사라는 호국불교의 지도자를 배출한 덕으로 조선 8대 가람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반포된 사찰령에 의해 직지사는 한때 해인사의 말사로 편입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국내 조계종 25본산 가운데 하나인 제8교구 본사이다. 소속 말사로 54개 사찰이 있고, 관할구역은 김천과 구미, 상주, 문경, 예천 등에 걸쳐 있다. 직지사는 신라 불교의 선구자였고, 고려 왕실과의 인연을 거쳐 서슬퍼런 조선에서도 호국불교의 성지로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이다.

우리는 직지사 탐방을 끝내고 증산면 수도산 아래 청암사로 향했다. 청암사는 원래 한국전쟁 중 소실된 쌍계사의 산내 암자였다. 지금은 직지사의 말사 가운데에서도 으뜸 사찰이자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으로 유명하다. 청암사는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도선은 풍수지리의 대가로 고려 왕건의 출생을 예언해 고려 왕실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던 인물이다.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니 명당 중에 명당이었으리라. 청암사는 비운의 여인인 인현왕후(조선 숙종의 비)와의 인연이 서린 사찰이다. 인현왕후는 서인으로 강등된 뒤 어머니의 고향인 성주 인근의 청암사로 숨어들었고, 극락전에서 3년을 은거하면서 복원을 기원했다고 한다. 실제 극락전을 중창할 때 나온 시주록에는 궁중 상궁들의 이름이 26명이나 올라 있었다고 한다. 상궁들이 청암사의 인현왕후를 돕기 위해 조정 몰래 청암사에 내려와 시주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청암사는 궁중 상궁과의 오랜 인연을 이었고, 김천고등학교의 설립자인 송설당(영친왕의 보모이자 상궁)도 청암사에 많은 시주를 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이 가야산의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 10대 사찰로 꼽은 보광사(지금은 수도암), 금오산의 대표 사찰이었던 길항사 등도 김천이 자랑하는 소중한 불교 유산이다.

이종규기자 김천·김성우기자 사진·정운철기자

자문단 송용배 김천시 부시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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