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임란'정란때 온 명나라 두사충 조선에 귀화 후 터 잡은 곳

입력 2009-10-08 07:02:13

뽕나무골목과 대명동

앞밖걸과 계산성당 사이로 난 골목 가운데 뽕나무골목이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따라 온 두사충이 조선에 귀화해 터를 잡은 곳이다. 두사충은 전쟁 때 지세를 살펴 어떤 장소에 진지를 구축해 적의 공격을 피하고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지 결정하는 전략 참모였다. 조선군과 합동작전에도 깊이 관여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나라로 돌아갔던 그는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으로 나와 전쟁에 임했다. 당시 제독 진린은 그의 매부였다. 두 아들과 함께 나온 그는 이땅에 남아 살기를 청했다.

조선 조정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현재 경상감영 터를 내주고 살도록 했다. 이후 경상감영이 그곳으로 옮겨오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주고 계산동으로 이사를 온다. 생계를 위해 집 주변에 뽕나무를 많이 심고 길쌈을 했는데 그 연유로 뽕나무골목이라 불렸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됐다. 두릉 두씨는 두사충이 그의 아버지를 시조로 만든 성씨다.

조선인이 됐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떨칠 수 없었던 두사충은 현재 영남대병원이 있는 야산에 단을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명나라 관복을 입고 명나라 황제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 그 단을 대명단(大明壇)이라 불렀는데 대명동이란 동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두사충은 죽기 전 자신이 묻힐 곳을 찾아 대구 근교를 다니다 지금의 2군사령부가 있는 형제봉에 묘터를 잡았다. 1912년 그의 후손들이 묘지 옆에 모명재란 재실을 지어 그를 기리고 있다.

대구 중구청은 최근 근대골목 디자인 개선사업을 하면서 골목을 새로 포장하고 뽕나무 몇 그루를 심어 뽕나무골목을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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