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 만에 빛 본 1947년 독도·울릉도 사진
◆이 한 장의 사진
-여기 실린 모든 사진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함부로 가져가시면 저작권법에 위배되고, 저작권료를 내셔야합니다. 주의하십시오-.
귀 위로 바짝 올려 깎아 '포마드'를 바른 헤어스타일, 헐렁한 구제 흰색 남방, 양은냄비…. 사진 속 인물은 전형적인 미군정 시절 '인텔리'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게 독도 동도 몽깃돌 해안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대구지역의 사진작가 고 최계복 선생이 촬영한 이 사진은 1947년 제4차 국토구명(究明)사업으로 울릉도·독도조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풍문을 확인시켜 주는 명확한 근거자료로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
최계복 선생은 대구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단(寫壇)의 거목으로 조선산악회 활동을 하면서 울릉도·독도 국토구명사업에는 보도사진반원의 일원으로 조사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해방 후 한 달 만에 창립한 조선산악회는 1946년 2월 26일부터 3월 18일까지 산악인, 학자 등으로 구성, 제주도 한라산 일원에서 제1회 국토구명사업을 벌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오대산·태백산 일원에서 31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2회 행사를 열고, 이듬해 1947년 7월 12일부터는 소백산맥 일대에서 제3회 행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당시 치안 불안으로 소백산 일대의 국토구명사업이 당초 계획과 달리 지지부진하자 그해 연이어 울릉도·독도 일대에서 제4회 국토구명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여기 실린 모든 사진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함부로 가져가시면 저작권법에 위배되고, 저작권료를 내셔야합니다. 주의하십시오. 고 최계복 사진-
울릉도 천부동 코끼리바위(일명 악어바위) 아래서 추산을 바라보고 있는 조사단원들.
울릉도 추산이 건너다보이는 천부동(현 천부초등학교 옆)의 너와집. 왼쪽의 일본식 가옥은 당시 천부고등공민학교 건물.
도동항에서 아낙네들이 오징어 배따기 작업을 하고 있다.
◆학자들의 우리땅 독도 확인 작업
울릉도·독도의 국토구명사업은 64명의 학자, 언론인, 산악인 등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 규모로 구성, 8월 16일부터 28일까지 13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조사단은 송석하(국립민족박물관장) 조선산악회 회장을 대장으로 조선일보 홍종인, 산악인 김정태, 서울대 방종현·김원룡·김용경·유하준·임창순 교수와 나비박사 석주명씨, 지질학자 옥승식씨 등이 참가했다.
또 사진보도반에는 최계복, 고희성, 현영일, 임주식씨가 참가했으며 전기통신반으로 체신부 무전기사 2명이 동참했다.
당시 조사단은 미 군정의 협조 아래 해군 통의부 소속 함정 '대전호'의 지원을 받아 도동에 도착했다. 이들은 울릉도에서 2개조로 나뉘어 도동~성인봉~나리동을 가로지르는 횡단조사와 도동~천부동을 잇는 해안조사를 마친 후 저동에 집결, 다시 대전호를 이용하여 다함께 독도로 건너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독도에서는 식생, 지질, 조류 등 각각의 전문분야별 조사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결과발표는 그해 9월 10일 서울의 국립과학박물관에서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사진 및 자료 650점에 대한 전시회는 10월 10일부터 동화백화점(현 신세계)에서 열렸다. 이후 전시회는 다시 11월 30일부터 부산일보에서 5일간, 해를 넘겨 1월 20일부터 10일간 대구 공회당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화를 겪으면서 보고서, 사진 등의 자료가 유실되고 1947년 독도에서 우리 손으로 진행한 국토구명사업은 단지 후대의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6·25전쟁 이후 1953년 들어 당시 독도의 식물상에 대한 별도의 보고서가 발간되기도 했으나 구전으로 전할 뿐 보고서는 전하지 않고 있다.
-여기 실린 모든 사진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함부로 가져가시면 저작권법에 위배되고, 저작권료를 내셔야합니다. 주의하십시오. 고 최계복 사진-
울릉도 아낙네들이 오징어 덕장에서 건조작업을 하고 있다.
울릉도·독도 국토구명사업단이 조사활동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한국산악회 제공) .
1947년 독도에서의 국토구명사업을 확인시켜준 사진 .
*2009년 8월에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볼 때 미군 폭격(1948~1952년) 이전인 1947년에 찍은 사진은 삼형제굴바위 옆 바위의 각이 뾰족하게 서있다.
◆일본 주장의 허구성 입증
일본은 그들의 외무성 독도 홍보팸플릿 여덟 번째 항목에서 "독도는 1952년 주일미군의 폭격훈련구역으로 지정됐으며, 일본 영토로 취급되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는 "미일행정협정에 입각해 주일미군이 사용하는 폭격훈련구역의 하나로 독도를 지정하는 동시에 외무성이 이를 고시하였다"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주장과 달리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1947년에도 독도는 엄연히 우리의 관리 아래 있었으며, 당시 미 군정도 이를 인정하였음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가 바로 이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고 있다.
미 군정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하고 조선산악회 회원들이 독도를 건너갈 수 있도록 해군 통의부 소속 함대를 지원한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은 미 군정 아래 있었으므로 만에 하나 독도가 일본 땅이었고, 미국이 그 사실을 인정했다면 '대전호'가 독도로 건너가도록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미 군정은 64명의 조사반원을 태우고 울릉도 저동항을 출발해 독도에 도착, 조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 조선산악회의 국토구명사업과 관련 자료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는 서울대 전경수 교수(인류학)는 "제주도에서 벌인 제1차 국토구명사업 활동을 보면 당시에도 조사반원들이 제주도를 건너가는데 미 군정이 수륙작전용 함정(LST)를 지원했으며, 섬 안에서의 활동에도 미군 장병이 지프를 직접 몰아 조사반원을 태워준 사진이 있다"면서 "독도에서의 조사활동도 미군이 적극 지원한 것이 확인된 것이고 일본의 '미 군정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 운운'은 순전히 일본 정부의 억지임이 이 한 장 사진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조선 인텔리'의 설거지 사진 한 장이 '독도 대한민국 땅'을 다시 한 번 증거하고 있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최계복 선생과 사진 입수까지
고 최계복 선생은 대구지역 사진계의 대부로 "남한 사단(寫壇)에서는 최계복"이라고 할 만큼 일제강점기 때부터 우리나라 사진계를 이끌어온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1909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사진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사진관과 사진 재료상을 운영하면서 서울과 지방의 각종 사진공모전에 입상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지역 사진계 1세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1964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이후 국내와는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지난 2002년 작고했다.
우리나라 사진사에 큰 획을 그은 최계복 선생의 행적을 그동안 후학들이 찾아 나섰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특히 사진역사연구소 최인진 소장(전 동아일보 사진부장)과 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은 2006년부터 최계복 선생의 행적을 찾아 대구 중구청 등지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올 초 권정호 전 부장이 최계복 선생의 생질인 정은규(몬시뇰) 신부를 만나 이야기하던 중 최 선생의 둘째 아들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주소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에 최계복 선생 탄생 100년을 맞는 올해 작품전을 열기로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다수의 사진작품을 국내로 들여오게 되었다. 최인진 소장과 권정호 전 부장은 사진 분류작업을 하던 중, 최근 매일신문에서 1947년 울릉도 독도 국토구명사업 자료를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의 사진을 발견, 본사에 제보한 것이다. '해방 이후 미국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했다'는 일본 측 주장을 뒤집는 이 한 장의 사진은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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