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서울 관악산

입력 2009-09-24 11:20:16

7개 산 중 든든한 '맏형' 장쾌한 암릉 퍼레이드에 압도

북에서 동으로 길게 뻗은 가'팔'환'초(가산-팔공산-환성산-초례봉)가 대구 북쪽의 성채라면 성'삼'비'앞(성암산-삼성산-비슬산-앞산)은 남쪽에서 분지를 넉넉히 받쳐주는 대구의 울타리다. 남북의 산군(山群)이 평원을 둘러싸 물길을 내고 삶터를 만들기로는 서울도 비슷하다. 풍수적으로 서울의 지세는 북벽처럼 둘러친 불'수'도'북(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과 강남에서 기름진 들을 넉넉하게 받쳐주는 '7산'이 빚어낸 선물이다. 광교산'청계산'우면산'관악산 등 7산 중 맏형은 단연 관악산이다. 남쪽에서 산군들을 아우르며 수도 서울의 무게중심을 이루고 있는 관악산으로 올라보자.

◆화기 강한 산세'''역대 왕조마다 구설수

관악산은 옛날부터 송악산, 화악산, 감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의 하나로 불렸다. 악(岳)의 명칭이 말해주듯 산 전체가 암릉과 암봉으로 이어진 대표적 석산이다. 바위의 강한 기운 때문에 관악산은 예로부터 화산(火山)으로 불리며 역사의 격변기마다 구설에 올랐다. 태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궁궐의 방위를 바꾸고 광화문에 해태상을 세워 화기를 누르려한 일화는 유명하다. 화기니 풍수니 하는 것은 옛 서가(書架)에서의 얘기일 뿐, 산꾼들에겐 그저 아름다운 바위산으로만 여겨진다. 632m의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계곡도 넉넉하고, 등산로 주변의 약수터도 20곳이나 된다. 서울대에서 연주대 쪽으로 맑고 깨끗한 계곡이 7부 능선까지 이어진다. 풍수에 문외한인 일반인 입장에선 이렇게 수기(水氣)가 넘치는 산에 화기(火氣) 운운하는 것이 생소하기만 하다.

◆육봉능선따라 펼쳐진 암릉

산행 들머리는 국사편찬위 뒤편으로 잡았다. 육봉능선을 따라 펼쳐진 장쾌한 암릉을 보기위해서다. 육봉능선은 팔봉능선과 함께 관악산 암릉의 백미를 자랑하는 코스다. 용운암을 비켜서 오르막길을 오르기를 30분여, 왼쪽으로 거대한 산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육봉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취재팀은 육봉의 전위봉격인 침봉(針峰)의 웅장한 자태에 감탄하며 본격적으로 펼쳐질 암릉퍼레이드를 준비한다.

만약 육봉이 없었더라면 관악의 남사면도 그저 밋밋한 코스에 그쳤을 것이고 환상의 조합으로 일컬어지는 팔봉능선과의 시너지효과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육봉능선의 시원한 눈맛을 뒤로하고 연주대를 향해 오른다. 중간에 들른 연주사에서 마침 공양시간을 맞았다. 나물비빔밥에 된장국 한 그릇이 전부다. 물론 잔반처리부터 설거지까지 셀프다. 점심 공양을 동력삼아 연주대를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연주암은 말 그대로 '누란지위'(累卵之危)의 구도다. 그런 아찔한 공간에 불사를 열었으니 종교의 덕목인 평안과도 배치될 터인데, 가람 배치 자체가 화두처럼 느껴진다. 더 물러설 곳 없는 극단의 점이 신앙의 출발이라는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함인가.

◆고려 충신들의 망국 한 서린 연주대

구름이 덮인 연주대는 서유구의 서울8경에서 제1경으로 일컬을 만큼 경치를 자랑하지만 그 내력으로 들어가 보면 진한 애환이 묻어나온다. 고려가 망하자 10명의 고려 충신들이 이곳에서 송도를 내려다보며 통곡했다는 애틋한 사연이 전해진다. '옛 군주를 연모한다'뜻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한편으로 후계에서 밀려난 양령, 효령대군이 이곳에 올라 궁궐을 내려다보며 태종을 연모했다하여 '연주암'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에 전하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관악산 기행기도 재미있다. 노량진에 살던 채제공은 67세 되던 해 봄 2박3일 일정으로 등산에 나선다. '곱사등처럼 기어서 마침내 정상을 정복 했다'는 표현으로 보아 노구(老軀)에 이곳 암릉을 얼마나 힘들게 올랐는지 짐작이 간다. 로프나 피켈이 없던 시절이니 갓, 도포 차림에 그 험한 암벽을 네발로 기어서 올랐을 것이다. 건장한 하인의 어깨를 빌리고, 밧줄에 의지해 아슬아슬 바위벽을 오르는 옛 사람들의 행렬이 눈에 선하다.

◆정상에 서면 병풍 같은 능선 한눈에

요즘 같으면 5~7시간으로 끝내는 종주가 2박씩이나 걸렸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아마도 이런 기행이 시회(詩會)나 탁족(濯足)같은 행사를 겸했을 것이므로 기녀들과 수십명의 하인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연주대 정상에서 내려 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병풍처럼 둘러친 불'수'도'북 능선도 한눈에 들어오고 과천청사 쪽 조망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번암도 300여년 전 관악산에서 경복궁의 정원을 보며 감탄했다고 여행기에 적고 있다.

하산길은 자운암, 깃대봉 쪽으로 잡았다. 팔봉능선의 웅장한 암릉이 눈에 밟혔지만 비가 내린 탓에 안전사고를 염려한 가이드가 깃대봉 코스를 강권하기에 그대로 따랐다. 나중에 일행 중 5, 6명이 악천후를 무릅쓰고 '암릉레이스'에 참여했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후회되었다. 팔봉능선만큼은 아니지만 깃대봉 쪽도 아기자기한 암릉과 암봉이 계속 이어져 그쯤에서 위안을 삼는다. 관악구 쪽 하산의 종점은 우리나라 인재의 요람인 서울대학교.

캠퍼스를 가득채운 성냥갑 모양의 연구동, 산만하게 벽을 가린 대자보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수재들의 공간이라는 점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산위에서 내려다본 지세(地勢)는 풍수에 문외한인 우리가 보아도 저런 터에서 공부하면 저절로 문리(文理)가 트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명산과 인재가 멋진 조합을 이룬 곳이니 캠퍼스 안에서 만큼은 나도 등산 수재인 듯 싶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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