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토 '100년만의 만남'] <7>뤼순감옥의 안중근

입력 2009-09-19 08:04:51

사형선고 받고도 태연자약…몸무게 오히려 2kg 늘어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마지막 5개월을 보냈던 감방. 2평 남짓한 감방에는 햇빛 드는 창가에 자그마한 책상이 있는데 이곳에서 안 의사는 54종의 유묵과 동양평화론, 안응칠 역사를 썼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마지막 5개월을 보냈던 감방. 2평 남짓한 감방에는 햇빛 드는 창가에 자그마한 책상이 있는데 이곳에서 안 의사는 54종의 유묵과 동양평화론, 안응칠 역사를 썼다.
안중근 의사가 있었던 감방 정면. 일제는 교도소장실 옆 감방에 수감해놓고 안 의사의 동정을 매일 살폈다. 정면에 동판으로 안중근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적어놓았다.
안중근 의사가 있었던 감방 정면. 일제는 교도소장실 옆 감방에 수감해놓고 안 의사의 동정을 매일 살폈다. 정면에 동판으로 안중근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적어놓았다.

뤼순(旅順)감옥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랴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공항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거리였다. 4차로 도로를 따라 달리면 별 특징없는 도로가에 악명 높은 뤼순감옥이 서 있었다. 입구는 러시아식 2층 건물이고 양 옆으로 붉은색 벽돌의 높다란 담장이 길게 뻗어 있다. 인근에 인가가 있고 저 멀리 감옥 뒤쪽에는 아파트단지가 높게 올라가고 있었다.

감옥 전체를 전시관으로 꾸며놓았는데 원칙적으로 외국인은 출입금지였다. 뤼순 일대가 중국 해군의 최대 기지로 군사보호시설이기 때문이다. 조선족 가이드는 "잘못하면 공안에 잡혀가니 동행할 수 없다"며 취재진에게 중국인인 것처럼 구경하라고 겁을 줬다. 그런데 감옥안에서 한국말로 떠들고 전시관 직원과 중국 관광객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봐도 별 탈은 없었다. 전시관 직원은 다른 곳을 촬영할 때는 제지하더니 안중근 의사가 갇혀있던 감방 앞에서는 오히려 촬영을 하라며 친절하게 권했다.

뤼순감옥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칙칙했다. 각국의 항일투사들이 많을 때는 2천명 넘게 수감됐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 700여명이 처형된 장소인 만큼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그렇지만 안의사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감방 앞에 서니 자연스레 숙연해지고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안중근의 마지막 5개월

안 의사가 뤼순감옥으로 옮겨온 것은 1909년 11월 3일이었다.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8일만이다.

의거 직후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전쟁 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일본으로 재판권을 재빨리 넘겼다. 안 의사는 뤼순 법정에서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를 죽였고 또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인데 이 뤼순법원 공판정에서 신문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무라 일본 외상의 '극형 지시'에 따라 안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순국때까지 뤼순감옥에서 5개월 가까이 머무는 동안 늘 의연하고 떳떳한 모습을 보였다. 단 한번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도 않고 일상에 거리끼는 일이 없었다. 대인(大人)의 풍모였다.

이 때문에 일본 간수와 헌병중에 안 의사의 인품을 존경하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공판정을 왕래하면서 경비를 섰던 일본헌병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도 그중 한명이다. 치바는 안 의사에게 유묵(遺墨·살아있을 때 남긴 글)을 부탁했지만 안 의사는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그러다 안 의사는 사형집행 30분전에 치바에게 유묵을 건네줬다. 그 유명한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나라위해 몸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보물 제569-23호)'이다.

김호일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은 "안 의사는 자신 뿐만 아니라 군인인 치바에게도 가슴속에 담을 만한 글귀라고 여겨 썼을 것"이라며 "타인을 배려하는 안 의사의 인품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이 유묵은 치바의 양녀가 가보로 보관하다 있다가 1980년 한국정부에 기증했다.

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말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행할 수 있다. 보물 제569-25호)도 당시 뤼순감옥 경찰관의 후손 야기 마사즈미씨가 보관하고 있다가 2002년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의 편저자 이성환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는 "이토를 저격한 것 자체보다는 인간적인 풍모와 불굴의 신념이 안 의사를 더 위대한 인물로 남게 했다"고 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안 의사는 죽음에도 초연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는데도 태연자약,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는 "(안 의사는) 이 판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미소를 머금었다"고 썼다. 이미 자신의 목숨을 조국독립에 바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안 의사가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하루는 검찰관이 신문하는데 그 말과 행동이 전일과는 아주 딴판이어서 혹은 압제도 주고, 혹은 억설도 하고, 능욕하고 모멸도 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리하여 분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일본이 비록 백만명 군사를 가졌고 또 천만 문의 대포를 갖추었다 해도 안응칠의 목숨 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또 무슨 권세가 있을 것이냐.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냐. 나는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

보통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으면 죽음에 대한 불안감으로 몸무게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러나 안 의사는 입감될 당시 14.4관(貫·약 54kg)이었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후 14.94관(약 56kg)으로 체중이 늘었다. 당시 일본어 신문인 만주일일신문(萬洲日日新聞)은 특이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신운용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책임연구원은 논문에서 "죽음을 앞두고 안 의사의 심리상태가 안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최후의 순간에도 안 의사는 당당했다. 당시 만주일일신문 보도를 보자. '전옥(典獄·감옥사무관) 구리하라(栗原)가 교수대 옆에서 사형 집행 취지를 고지하자 안중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알았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였다. 구리하라는 재차 안중근에게 뭔가 유언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말에 안중근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내 자신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니 나의 사후에도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하여 동양평화의 유지를 꾀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당당히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장성혁 동영상기자 jsh0529@msnet.co.kr

※ ▶ 버튼을 클릭하면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