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국근의 風水기행]<41>영양 주실마을

입력 2009-09-19 08:20:00

단아한 文筆峰…지혜와 지조를 낳다

주실마을 전경. 가운데 기와집이 몰려있는 곳에 종가인 호은종택이 있다.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은 와혈의 형상을 띠고 있으며, 매를 날려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실마을 전경. 가운데 기와집이 몰려있는 곳에 종가인 호은종택이 있다.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은 와혈의 형상을 띠고 있으며, 매를 날려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실마을의 상징인 문필봉. 단아한 모습은 문필봉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주실마을의 상징인 문필봉. 단아한 모습은 문필봉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주실마을=행정구역상 명칭은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조선 중기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터를 잡은 이후 한양조씨들이 380년간 세거한 동족마을로, 박사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때 일부가 소실됐으나 1960년대에 복원됐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이 마을 출신이며, 비보풍수로 조성된 마을 입구의 숲은 2008년 '전국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바 있다. 경북도기념물 제78호인 호은종택(壺隱宗宅), 경북도민속자료 제42호인 옥천종택(玉川宗宅), 지훈문학관 등이 마을 내에 입지해 있다.

명문고택이나 명묘(名墓) 주위의 산세엔 대부분 한, 두개의 문필봉(文筆峰)이 있다. 붓은 곧 글이 되고, 문장이 된다. 즉 학식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신분이었던 '글 잘하는 선비'의 표상이 이 문필봉이다. 따라서 터를 고를 때 제1의 요건이 문필봉, 즉 필봉(筆鋒)이었다 하겠다. 따라서 그 당시의 명당 찾기는 곧 필봉을 찾는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산세 뿐 아니다. 바위도 해당이 된다. 호남의 거유(巨儒)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향한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이 그것이다. 서원의 이름은 곧 붓 형태의 바위를 지칭한 것이 되고, 실제로 서원서 멀지않은 그가 태어난 마을 입구엔 붓을 닮은 바위가 있다.

필봉은 말 그대로 붓을 닮아 뾰족한 삼각형 봉우리다. 붓을 닮은 그 산의 기운이 거주자에게 미친다고 보는 게 풍수다. 주위의 산세가 그 곳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것은 굳이 풍수를 들이대지 않고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이 좋은 예가 된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 동서양이 다를 바 없다.

문필봉하면 떠오르는 곳이 주실마을이다. 문필봉의 교과서라 할만도 하다. 박사가 많이 배출됐다고 하는, 즉 결과론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만큼 잘 생겼다는 말이다. 필봉은 삐딱해선 안된다. 수려하고 단정해야 한다. 그것도 이쪽에서 보나 저쪽에서 보나 한결같은 모습이면 더욱 좋다. 삐딱한 필봉아래선 학자가 나도 올바르지 않다. 곡학(曲學)하는 학자가 난다. 이는 곧 세상을 호도하는 사이비학자다.

풍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안산이다. 즉 좋은 산세가 좌우에 있는 것보다 집터나 묘터의 앞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실의 문필봉은 안산이 된다. 최적의 조건이다. 여기에 벼루에 먹을 갈 때 필요한 물을 담아두는 연적봉까지 나란히 붙어있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주실의 주택들은 대부분 이 필봉을 바라보고 서있다. 그만큼 주실에선 이 필봉을 중시한다.

문필봉뿐만 아니다. 그 옆으론 노적봉(露積峰)도 솟구쳤다. 노적봉은 노적가리를 닮은 산이다. 문필의 문(文)에다 노적의 부(富)까지 갖춘 지세다. 골짜기의 좁은 지세에서 그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닌, 풍수의 위력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주실을 흔히 호리병 형국이라고 한다. 사실 골짜기의 모습이 꼭 닮았다. 가운데가 넓고 양쪽으로 좁다. 마을 입구 쪽이 주둥이가 된다. 병의 주둥이가 넓으면 속에 든 물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물이 나가는 것이 보이면 재물도 사라지고 건강도 나빠진다. 기운도 함께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꽉 막혀야 한다. 주실마을 입구에도 비보로 조성된 숲이 있다. 뿌리 내린 지 수백 년이 지난 느티나무, 소나무 등으로 빼곡하다. 수구막이 숲이다. 이 숲은 2008년 '전국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실조씨 문중엔 삼불차(三不借) 원칙이 지켜져 온다. 세 가지 빌리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이다. 인불차(人不借), 재불차(財不借), 문불차(文不借)가 그것이다. 사람을 빌리지 않고, 재물을 빌리지 않고, 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가, 조지훈 하면 시인 이전에 먼저 '지조론(志操論)'을 떠올린다. 당당하게 산다는 것, 이게 곧 삼불차의 정신일 터이다.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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