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남매 맏며느리 역 묵묵히'''문중 제사 큰 짐"
매미들이 가는 여름을 붙잡듯 새차게 소리 지르던 뜨거운 날, 상주시 청리면 가천리 창석 이준(李埈'1560 ~1635)선생 종가를 찾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상에 포도, 배, 밤이 수줍은 종부처럼 반긴다. 가지런히 놓인 배를 보면서 하얀 모시옷 다려 입고 곱게 배를 깎는 종부의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어느 소설책에서나 본 대가의 종부 모습을 그렸으리라. 하지만 창석종가의 종부 윤갑묵 여사는 머리 속 종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마루에 오르니 잡숴 보라며 내미는 종부의 손마디가 유난히 굵다. 마디가 붉어지고 유난히 닳은 손톱이 권하는 과일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리친정에 부친은 여자는 어쨌든간 애를 먹어야 된대여
여자는 시동생도 많고 제사도 많은 곳에 시집 가야 된다시던 파평윤씨 대운공파인 친정아버지의 말씀대로 스물네살에 흥암 이씨 창석공파 13대손 종부가 됐다. 종부의 친정 아버지는 밤낮으로 책을 보시고 글이 좋은 분이셨지만 '여자는 보통만 알면 된다'며 글을 잘 가르쳐 주지 않았다. 경남 거창군 남하면 양학리 상촌에 살던 윤갑묵 여사는 딸 셋 집안에 둘째딸로 태어났다. 여자는 무조건 종부가 되어야 한다는 친정 아버지의 권유로 언니와 동생도 맏며느리로 출가했다. 종부가 되려면 제사 지내는 것도 알아야 한다시던 친정아버지는 칠촌의 제사를 일부러 모시고 와 딸들에게 제사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천석꾼의 외동딸로 커 온 친정어머니는 시집 올 때 혼수를 60여명이 지고 왔을 정도로 부잣집 딸이었다고 한다. "천석군의 집에, 부잣집에서 커서 우리 엄마는 못먹는 게 천 가지가 넘으니, 호강에 바쳐. 영감 잘 만나고" 가리는 음식수가 천 가지가 넘는다는 그런 천석꾼의 외동딸. 종부는 글 좋은 아버지와 생활고의 힘겨움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머니 밑에서 그렇게 자랐다.
◆세계여행 시켜준다던 남편, 혼인한 지 팔 년 만에 갑자기 저세상으로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할 말도 없어. 얼굴이나 알란가?"바깥어른인 종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종부는 갑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종부의 손에는 낡은 노트 두 권이 쥐어져 있었다. 노트 사이로 끼워져 있는 얼기설기한 종이들도 함께 보인다. 삼십년도 더 접혀져 있던 누런 종이를 곱게 쓰다듬으며 펼쳐 보인다. 타이핑 하지 않고 손으로 쓴 상업 시험지 한 장, 낡아 구멍이 뚫린 편지 몇 통, 신분증이다. 맨 처음 종부는 상업 시험지를 펼쳐 보이며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가 이 시험지를 여지껏 지니고 있어"한다.
'사랑하는 아내'로 시작하는 신행 전 받았던 편지 다섯 통에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아 있다. 취직되는 날 당신한테 선물을 한아름 안고 달려갈테니, 당신은 그저 하루에 두어 번씩 웃는 연습이나 하고 있으라는 새신랑의 마음이 가득한 편지가 신분증과 함께 사십 년 세월을 버텼다.
남편은 고등학교 상업 교사였다. 추운 겨울날 제자를 만나러 들어간 곳에서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그길로 부부는 더 이상 이승에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평소 부잣집 딸을 데리고 와 고생만 시킨다며 미안해하며 세계여행 관련 책 12권을 사다 주면서 세계여행 시켜줄 테니 열심히 보라던 자상한 남편이었다.
종부는 "세계여행이 다 뭐라, 고생 뭐 이렇게 시키대?"하면서 손을 가리고 웃는다.
◆내가 시집 온께 우리 어머님은 서른다섯, 나는 스물 넷.
종가로 시집가면 애 먹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제사가 많은지 몰랐다며 제사 이야기를 꺼내는 종부. 창석 이준은 조선 중기 유성룡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정묘왜란 때 여러 차례 의병을 소집하고 상주의 읍지인 상산지를 찬정한 분이다. 창석 이준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부는 일년에 불천위 포함 16번의 제사를 모신다. 제사 횟수는 많지만 그 많은 제사 우리 어머님이 다 알아서 한다시는 종부께 시어머니 이야기를 건냈다.
시집을 오니 어머님이 서른다섯, 종부가 스물넷이었다. 막내 시동생과 종부의 큰아들의 나이 차이는 다섯 살이다. 전처에서 낳은 1남 3녀, 시어머니가 낳은 5남, 종부는 9남매의 맏며느리다. 시집 오던 날 친정아버지가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알려고 애도 쓰지말고, 니가 일어서려고 하면 가정의 풍파가 생긴다"고 당부했다. 양반의 집에는 재취 시어머니, 계모 같은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다 점잖아서 그런 것은 보고도 그대로 넘어가야 한다고, 또 그렇게 살아야 집이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 종부의 생각이다.
◆종부가 뭐라! 딸 있으마 택도 없지!
삶의 짊이 너무 무거웠던 종부에게 문중의 제사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무슨일이라도 제사만 다가와도 가우(가위)가 눌리는 기, 내 몸 자체가 그렇다니까. 제사는 내가 지내야지" 강당이라고 적혀 있는 불천위 제사의 제수 물품이 적혀있는 손부의 노트가 눈에 들어온다. 꼼꼼히 적은 글씨도 말수 적은 종부 같다. 영수증도 붙여 놓았다.
딸이 있으면 종부로 시집 보내시겠냐는 물음에 말보다 손사래가 먼저 쳐진다. "종부가 뭐라! 딸 있으마 택도 없지!" 제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종부는 '우리어머님이 다 하셨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새긴다. 우리어머님이 참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거듭 당부한다.
마당에 깨를 널어 놓았다. 신종플루 때문에 손자의 유치원이 임시휴원이란다. 손자의 장난에 깨 다 떤다며 일으키는 종부의 허리는 굽어있다. 세월이 지나니 별 희한한 병이 다 생긴단다. 별 희한한 병이 다 생겨도 종부가 묵묵하고 한 몸 희생하면 집안의 풍파가 안 생긴단다. 서른둘에 혼자되어 세 아들을 똑바르게 키워낸 종부의 손에는 강당이라고 적혀있는 불천위 제사의 제수목록이 예전처럼 똑같이 쥐어져 있다.
김유희 상주민속박물관 학예사 folklore96@korea.kr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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