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을 갖는 일은 누구에게나 평생의 꿈이다. 떠밀려 떠돌지 않으니 마음이 안정돼 일에 매진할 수 있으니 내 집이야말로 고향처럼 편한 터전인 것이다.
사회인 야구가 대구에서 기지개를 편 시기는 1993년 무렵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동국무역, 갑을방직, 경상공고같은 기업형 팀들이 선수 출신을 영입하여 잠시 화려한 꽃을 피우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리그 방식이 도입된 것은 10여년이 지나서였다. 프로야구가 연일 화제가 되고 삼성 라이온즈가 늘 한국시리즈에 올라도 대구의 사회인 야구팀은 30여개팀 정도로 연간 세 차례 벌어지는 토너먼트 대회가 전부였다.
그러던 것이 1994년 서울을 제외하고 리그 방식의 사회인 야구대회가 대구에서 처음으로 탄생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삼성에서 퇴사한 필자가 프로야구 방식을 모방하여 대회를 창설했는데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개인 기록 제도를 도입한 것이 큰 반향을 불러왔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상용화되지 않아 도스 시스템으로 작업하여 개인 기록을 정리해 나누어 주었는데 비록 연간 15경기에 불과하지만 매주 자신과 다른 선수들의 기록 통계를 보면서 경쟁한다는 자체에 신기해했다.
몇 년 후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필자는 나름대로 기록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일반인도 프로야구 선수처럼 경기 다음날 모든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되자 회원은 배로 증가했다. 필자의 기록 프로그램 시도는 급기야 전국의 사회인야구 단체에서 벤치마킹을 하면서 폭발적인 관심를 끌었고 오늘날 전국에서 7천여개 팀에 이르는 사회인야구 붐의 효시가 됐다.
그러나 늘어난 야구팀에 비해 야구장이 부족했다. 2000년에 이르러 사회인야구 단체도 늘어났고 팀도 200여개로 늘어났지만 무대는 당시 야구부가 있는 6개 학교가 전부였다. 필자가 맡은 단체의 회원이 천명이 넘자 필자는 미군부대 내 야구장을 교섭해 사용했고 왜관 강나루 운동장을 야구장으로 개조해 경기를 가졌지만 왜관에도 자체 단체가 생기면서 물려주고 경산 환상리에 있는 종합운동장 예정부지로 옮겨 펜스를 설치해 경기를 가졌다. 그러나 경산에도 야구단체가 발족되면서 또다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 사이 열악한 환경에도 회원은 주5일제 근무와 높아진 야구 열기에 2천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다 인연이 닿아 지난해 달성군을 통해 방천에 야구장 사용 허가를 얻었고 금호강 정비계획에 앞서 임시구장을 지어 2천명의 회원들이 돌아가며 아쉬운 대로 야구를 즐기고 있다. 십년 가까운 떠돌이 신세는 면한 것이니 지면을 빌려 이종진 군수와 애써준 달성군 관계자에게 2천명의 고마움을 전한다.
오늘날 대구의 사회인야구팀은 700여개 팀으로 회원은 1만5천명에 이른다. 그러나 뛸 운동장은 10개로 격주로 경기를 가진다 해도 필요량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야구를 좋아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겐 야구장은 늘 가고픈 집이나 마찬가지다. 3천평이 필요한 집을 개인이 살 수도 없으니 구도 대구의 자존심이 상할 뿐이다.
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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