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의 시와 고향] 고향 / 김용락

입력 2009-09-14 07:58:50

뒷울타리의 산유수꽃

흙담장 아래 코딱지꽃

부황든 들판의 보리꽃

수챗구멍의 지렁이꽃

누이 얼굴의 버짐꽃

빚 독촉 아버지의 시름꽃

피는 봄밤에 몰래 집 나왔었는데

이젠 다시 살구꽃 피는

고향 그리워

누구에게나 지나간 것들은 모두 꽃이다. 아름답건 아니건 가슴 아련하게 했던 것들, 모두 꽃이다. 시간의 꽃대궁 위에 산수유가 핀다면 코딱지만 한 코딱지도 세월의 아련한 힘으로 꽃이다. 꽃들의 색이 바래었기에 꽃들은 죄다 입자가 거칠고 굵은 흑백의 기억들이다. 처음의 산수유꽃과 마지막의 살구꽃 외에는 모두 감정이입된 꽃이다. 산수유와 살구꽃을 통과하면서 그러한 감정이입은 고조되어 죄다 꽃이 된다. 코딱지꽃에서부터 시작한 꽃들은 보리꽃, 지렁이꽃, 버짐꽃, 시름꽃들을 통과하면서 점점 시름의 강도를 높여간다. 버짐꽃과 시름꽃은 사람의 얼굴에 피는 근심꽃들이다. 고향은 그렇게 꽃대궐 속이건만 젊은 사람에게 고향은 징그러운 곳이다. 되돌아볼 수 있다면, 고향이란 말은 쓸쓸하고 다정다감해진다. 고향이란 말 속에는 언젠가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기에 고향은 집을 떠난 자의 언어이다. 살구꽃 천지를 뒤덮은 봄날, 집이 먼 사람에게 고향의 꽃들이 활짝 핀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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