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백두를 가다] (37) 문경 길①

입력 2009-09-11 08:13:59

영남대로 중심인 문경새재…한양과의 '소통' 가교

문경은 백두대간과 영남대로를 품고 있다. 문경은 조선의 대동맥인 영남대로의 중심에 서서 예나 지금이나 한양과 영남을 잇고, 열어주고 있다. 사진은 문경새재의 첫 관문인 주흘관과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 조령관(제3관문).
문경은 백두대간과 영남대로를 품고 있다. 문경은 조선의 대동맥인 영남대로의 중심에 서서 예나 지금이나 한양과 영남을 잇고, 열어주고 있다. 사진은 문경새재의 첫 관문인 주흘관과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 조령관(제3관문).

길을 가면 산과 물을 만나기를 수없이 되풀이한다. 산을 한번 만나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물을 만나야 하고, 물을 만난 다음에는 또다시 산을 만나야만 한다. 산을 연거푸 두 번 넘을 수는 없으며, 물도 두 번 건널 수 없다. 길이 산을 만나면 고개요, 물을 만나면 나루이다. 길은 산과 물의 '동무'다. 또한 길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크고 작은 길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산과 물을 연결하고, 인간의 삶을 이어주고 있다.

그 길을 걷기 위해 우린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길, 문경새재에 올랐다.

9월 초, 절기는 가을이지만 여름 더위는 통 물러갈 줄 몰랐다. 영남 제1관(주흘관)에 섰다.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조선 숙종 때 세웠고, 새재의 3개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제일 잘생겼다는 의미다. 주변 경관은 수려했다.

근데 왠지 숨이 턱 막히는 것은 뭘까? 관문의 병풍인 백두대간의 위압 때문이었다. 과연 넘을 수 있을까? 그 옛날 선조들은 등짐까지 지고 넘었는데, 우린 그저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을 위로 삼아 걸음을 뗐다. 1관문을 지나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져버렸다. 몇 달 전 맨발 투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기에. 땅이 부드러웠고, 물기를 머금어 촉촉했다. 스펀지 같다고나 할까. 토닥토닥 내딛는 맨발에 전해오는 느낌은 상쾌함이었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오르내리는 나그네와 아낙들이 많은가 보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만큼의 시간이 흘러 드라마세트장 앞 '발 씻는 곳'에 도착했다. 길을 시작한 이, 길을 마친 이들이 모인 곳이다. 발을 씻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왕복 30리 길에 괴나리봇짐 장수, 보부상, 아낙, 과거 보러가는 선비, 관리의 형상을 머리에 담았다.

첫 관문에서 1㎞ 정도 걸었을까. 길 옆에 어른 키를 훌쩍 넘긴 돌담이 이어지고 있다. 조령원터다. 4개의 건물터가 표시돼 있고, 초가 형태의 옛 거처를 복원해두고 있었다. 바로 옛날 문경새재를 넘나들던 관리들의 숙박시설이다. 발굴 당시 엽전, 말발굽쇠, 마령(馬領), 정 등의 유물이 출토돼 관리들과 말들이 쉬어 간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새재 안에만 조령원 이외에도 동화원, 신혜원 등의 숙박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조령원터 위쪽에는 주막이 있다. 지금도 길손들을 맞고 있다. 새재는 조선시대 때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가장 큰 길이 아닌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을 오르던 선비,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 보부상과 괴나리봇짐 장수, 시인묵객들은 한 잔의 술에 여독을 풀고, 서로의 정을 이 주막에서 나눴으리라.

주막을 뒤로하고 2관문으로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교귀정이 시야에 잡힌다. 경상도의 첫 땅인 문경새재에서 경상도 관찰사의 교인식이 이뤄지던 곳이다. 부임한 경상감사와 한양으로 떠나는 전임 감사가 임무를 교대하고, 잠시 여독을 푼 곳이 아니겠는가. 우린 지그시 눈을 감고 경상감사의 긴 부임행렬을 되짚었다.

교귀정을 지나면 2관문인 조곡관이 턱하니 버티고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 때 축성됐다. 임진왜란 때 새재에서 왜적을 막지 못한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축성된 안타까운 역사가 담긴 곳이리라.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은 지형상 새재에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방비했어야 했다. 하지만 신 장군은 조령이 아닌 충청도의 평야지대에서 왜군을 맞이했고, 결국 대패했다. 한양으로 가는 가장 큰 관문인 새재를 내줌으로써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강을 타고 조선의 심장을 접수해 버린 것이다.

2관문을 지나자 숨이 더욱 차올랐다. 2관문까지는 산길치곤 밋밋했지만 2관문 이후부턴 길이 좁아지고, 눈과의 거리도 갈수록 짧아졌다. 오가는 이도 뜸했고, 이마와 등엔 땀범벅이었다. 그래도 반가운 손님이 길옆에 나란히 서 있어 위안이 됐다. 돌탑이다. 수천년 길손의 가슴이 묻힌 곳이다. 그 옛날 길손들은 이 앞을 지나면서 한개의 돌이라도 쌓고 갔다. 선비는 장원급제, 몸이 아픈 사람은 쾌차를, 상인은 장사를 잘되게 해달라고, 아들을 못 낳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출발한 지 2시간이 지나서야 정상의 3관문 턱밑에 다다를 수 있었다. 길 옆에는 옛 길이 3관문까지 직선으로 나 있다. 그 초입의 안내판이 눈에 띈다. 장원급제 길이라고 적혀 있었다. 새재 길의 끝이자 가장 좁고, 가팔라 장원급제 길이라고 이름한 것 같다. 조선조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한양으로 넘나들던 바로 그 길이다.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고 해 호남의 선비들까지 먼길을 돌아 이 길을 택했다고도 한다.

우리도 장원급제 요량으로 옛 길을 택했다. 마지막 땀까지 짜낼 즈음 하늘이 확 열렸고, 정상의 3관문인 조령관이 눈에 잡혔다. 장원급제(?)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만 같았다. 조령관은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있다. 숙종 때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1관문과 함께 쌓았다. 조령관은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가 경주에서 올라온 가토 군대와 조우한 곳이라는 아픈 역사도 가졌다. 조령관은 영남과 한양의 소통처이자 군사 요충지였던 것이다.

문을 지나면 바로 충청도 땅. 우린 다시 등을 돌려 경상도 땅을 바라보았다. 열린 관문엔 하늘이 꽉 찼다. 옛날 시인묵객들의 감흥은 어떠하였을까? 짐작해도 모자랄 판이다. 율곡 이이는 새재를 이렇게 읊었다.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 지고 돌아간다.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숙조령·새재에서 묵다)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회재 이언적, 다산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명현거유들이 새재의 묵객들이었으리라.

이종규기자 문경·권동순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안태현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정옥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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