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숲에서 문향 넘쳐나고
대구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안동 IC로 빠져나와 안동시내로 진입한 다음 34번 국도를 타고 진보를 지나서 영덕방면으로 가다보면 삼거리가 하나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 영양으로 가는 31번 국도를 타고 영양읍을 지나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일월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좌회전해 918번 도로를 타고 조금만 가면 오른쪽에 조지훈의 시비가 세워져있고 그 뒤로 주실마을이 보인다.
주실마을(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은 350여 년 전 호은공(壺隱公) 조전 선생이 입향조인 한양 조씨(漢陽 趙氏) 집성촌이다. 이 집안은 본래 한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같은 가문의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축출되자 한양을 떠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1630년 경 호은 조전 선생이 가솔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청록파 시인이자 '승무(僧舞)'의 시인 조지훈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 주실마을은 산골등짝이가 서로 맞닿아 이뤄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 혹은 주곡이라 부른다.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지조 있는 마을로 자부심이 대단하다. 조지훈 외에도 한국 인문학의 대가인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주실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시인의 숲'이라 불리는 보호숲이 있다. 외부로부터 보면 숲에 가려 마을이 보이지 않아 일명 '주실쑤'라고도 하는데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곳에는 조지훈 선생의 시 '빛을 찾아가는 길'을 새긴 시비가 있고 21세에 요절한 그의 형 조세림의 시비도 있다. 지난해 생명의 숲과 산림청이 뽑은 '올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될 만큼 수령 100년의 소나무와 250년이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느릅나무가 풍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꿀을 묻힌 잎사귀를 갉아 먹은 벌레가 만든 발자취, 주초위왕(走肖爲王)이 결국 이 마을에 주실숲을 만들지 않았을까.
주실마을은 앞으로는 문필봉'오적봉'영적봉, 뒤로는 매방산에 둘러싸여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으며 고택들이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숨결을 느끼게 해준다. 마을 앞 개울은 숲으로 이어져 주실숲의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다. 현재 50여 가구의 후손들이 고추농사를 지으며 옛 선조의 얼과 기개를 이어가고 있다.
주실마을 안에는 조지훈과 그의 형 조세림이 태어난 호은종택(壺隱宗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이 있다. '호'는 호리병을 뜻하며 '호은'이란 '호리병을 가지고 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전에 의하면 호은종택은 호은공 조전이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매가 앉은 자리에 지은 집이라고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곳은 평지나 언덕이 아니라 물기가 배어 있는 늪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늪지를 메워서 사찰을 세우는 것은 고대 불교의 풍습으로 호은고은 주자 성리학을 연찬한 유가의 선비이지만 내면세계의 한 부분에는 도가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지훈 선생이 한문을 수학한 월록서당(月麓書堂'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은 '주실마을의 인재양성소'로 구한말 이후에는 신교육을 가장 먼저 실시한 신교육의 전당이다. 서당의 중간은 마루이고 양쪽은 방으로 왼쪽은 존성재, 오른쪽은 극복재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만곡정사(晩谷精舍)는 조선 후기 명문장가로 유명한 만곡 조술도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선생의 집을 드나들던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지은 정자이다. 만곡 선생은 옥천공의 손자로 조선 후기의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번암 채제공과 뜻을 같이한 동지였다. 만곡정사의 현판 글씨도 채제공이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직접 주실을 방문해 그 기념으로 남긴 것이다. 또한 경북 북부 지방 특유의 'ㅁ'자형 뜰집의 전형의 보여주는 옥천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호은 종택과 지훈문학관 사이 길을 오르면 시공원에 이를 수 있다. 이곳에는 조지훈의 시 가운데 골라 뽑은 20여 편이 돌에 새겨져 있어 그의 작품세계를 음미할 수 있다.
주실마을을 찾으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지훈문학관'이다.'지훈문학관'은 지조론의 학자였던 조지훈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2007년 5월 처음 문을 열었다. 170여 평 규모에 단층으로 지어진 목조 기와집이 'ㄷ'자 모양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입구에 있는 현판은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썼다고 한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지훈 선생의 대표시 '승무'가 흘러나오는데 언제 들어도 유려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문학관 내에는 지훈의 소년시절 자료들, 광복과 청록집 관련 자료들, 격정의 현대시 속에 남긴 여운, 지훈의 가족 이야기 등이 전시돼 있다. 또한 외출할 때 즐겨 입었던 외투와 삼베 바지, 30대 중반에 썼다는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다는 부채, 세상을 뜨기 6, 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와 안경 등 그가 직접 사용했던 물건들도 만날 수 있다. 문학관 내 설치된 헤드폰을 통해 투병 중이던 그가 여동생 조동민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를 들을 수 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깊은 여운을 준다.
전수영기자 poi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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