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예술 산책] 제임스 카메론 감독/ 타이타닉

입력 2009-08-29 07:00:00

로즈의 누드는 위선 가득찬 상류사회에 날리는 펀치

인간이 원숭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팬티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가릴 줄 알아야 하고, 가리지 못하면 수치스럽게 여겼으니 그것이 원숭이와 다른 점이다.

사실 팬티는 옷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사각형의 바지 타입의 팬티가 언제부턴가 돌돌 말면 500원짜리 동전 크기로 작아졌다. 요즘은 끈이 달린 T팬티가 유행이라니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됐다.

보온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을 충분히 가려주지도 못한다. 그저 입어야 하는 의무적인 구비 조건일 뿐이다.

요즘 세태를 보면 모두 옷을 벗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것 같다. 여자 연예인은 벗은 몸의 화보를 찍고, 미모 대회의 수영복도 갈수록 면적이 작아지고, 일반인들의 옷도 가리는 것보다 보여주는 부위가 훨씬 넓어졌다.

그렇더라도 '노팬티'라는 단어가 주는 위력은 대단하다. 춤추던 여가수의 치마가 살짝 들렸는데 팬티를 입었느니, 안 입었느니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팬티의 무게가 아무리 작아져도, 그 존재감은 가죽 코트보다 더 무거운 것이 사실이다.

벗는다고 모두 누드는 아니다. 영화 속에서 벗은 몸(naked)은 주로 야한 영화의 몫이고, 섹스어필한 도구다. 그러나 남의 시선 앞에 완전히 벗고 선다는 것, 그것이 주는 자유로움과 굴레를 벗는 느낌은 대단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게이 화가 사이먼(그렉 키니어)은 어머니의 누드를 그리다가 아버지에게 쫓겨났다. 그 아픈 기억을 잊게 해준 것이 이웃의 웨이터리스 캐럴(헬렌 헌트)이다. 그녀는 사이먼 앞에 알몸으로 서고, 사이먼은 캐럴의 누드를 완성함으로써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세드릭 칸 감독의 '권태'는 아내와 이혼 후 삶의 의미를 잃은 40대 철학 교수가 17세의 누드 모델에게 집착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광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관념적인 철학자가 다분히 형이하학적인 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철학의 새로운 시선인 몸 현상학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누드는 몸과 영혼의 문제를 촉발시킨 계기다.

누드의 메타포를 가장 잘 표현한 영화가 '타이타닉'이다.

1990년대 과학자들이 최첨단 장비를 동원해 침몰한 타이타닉 호를 탐사한다. 이상한 궤짝을 발견해 기대에 부풀어 열어보지만 거기에는 한 여인의 누드화만 있을 뿐이다. 1차 세계대전도 일어나기 전인 1912년 침몰한 배에서 발견된 여인의 누드화. 과연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 목에 걸린 커다란 보석을 봐서는 하류층의 여인은 아닌데, 그 당시 알몸으로 자신을 드러낼 귀부인이 있었을까.

누드화의 주인공은 로즈(케이트 윈슬렛)이다. 귀족 집안의 망나니 아들과 결혼을 앞두고 타이타닉에 승선한 여인이다. 엄격한 규율과 예절을 요구하는 상류사회에 숨 막혀 있던 그녀는 배 끝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자유로운 영혼의 가난한 남자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을 만나게 된다. 그의 매력에 빠진 로즈는 결혼 예물로 받은 목걸이만을 한 채 알몸으로 잭에게 누드화를 그려달라고 한다.

가난한 화가는 비스듬히 누운 로즈의 풀어헤친 머릿결, 맑은 눈빛, 그리고 가슴선을 그려 나간다. 그의 눈빛은 벗은 몸을 보는 욕망의 시선이 아니다. 냉철하게 로즈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녀의 영혼을 담아낸다.

'타이타닉'에서 로즈의 누드는 가식적이고 고루한 상류층에 던지는 펀치와도 같은 것이다. 거만하게 차려 입고, 형식과 틀에 매여 인간의 가치를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하층민이라고 여겨지면 무시하는 그들의 패턴을 파격으로 꼬집은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앞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의 인간으로 다가서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타이타닉호의 금고 속에서 나온 누드화 한 장은 잭과 로즈의 사랑뿐 아니라 시대를 거부하는 한 여성의 위대한 영혼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의미 있는 이 장면이 국내 개봉에서는 훼손됐다. 케이트 윈슬렛의 젖가슴이 드러난 장면이 잘린 것이다. 누드의 아름다운 의미보다, 벗은 몸에 집착하는 근시안적인 시선이 그대로 표출된 예다.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는 영혼이 담배 연기처럼 가볍다고 전제하고 있다. 또 숀 펜이 주연을 맡은 '21그램'에선 영혼의 무게를 21그램으로 잡고 있다. 영혼이 21그램이라면, 팬티를 의식하는 무게는 얼마나 될까? 0.00001그램이나 될까?

김중기 객원기자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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