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토 100년만의 만남] <4>식민지화 역할(下)

입력 2009-08-29 07:11:08

청일전쟁·을사조약 체결 등 한국합병 총기획

1906년 조선통감인 이토가 도쿄에서 한복을 입고 친일파 부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뒷줄 가운데가 이토,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토의 부인인 기생 출신 우메코(梅子).
1906년 조선통감인 이토가 도쿄에서 한복을 입고 친일파 부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뒷줄 가운데가 이토,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토의 부인인 기생 출신 우메코(梅子).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옛집 옆에 있는 동상을 일본 관광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옛집 옆에 있는 동상을 일본 관광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의 식민지화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구한말 대형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토가 개입하지 않은 때가 거의 없다. 그는 한국 병합의 기획자이자 실행자였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흉적' '간적'으로 봤다. 타격 목표를 정확하게 잡아 제대로 성공시킨 셈이다.

▶대형 사건마다 배후조종=청일전쟁은 1894년 이토가 두번째 내각총리대신 재임 중 일어났다. 조선 정부가 동학혁명으로 인해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일본군 파병을 지시했다. 신중한 정치행보로 '겁쟁이'로 통했던 이토가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은 이례적이었다. 각료회의는 '마침내 (한국을 병합할) 기회가 왔다'는 분위기로 진행됐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도 이토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시해 주범은 총리 이토, 전임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후임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육군중장 출신) 등 3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조슈번(현재 야마구치현)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에 참여해 출세한 인물들이며 특히 이토와 이노우에는 젊을 때부터 생사를 같이한 동지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다. 이것이 "한국 병합은 조슈번 사람들이 이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조선공사 이노우에는 이토 총리와 조선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한성을 출발해 6월 20일부터 24일간 머물다 한성에 7월 19일 돌아왔다. 후임 미우라가 9월 1일 부임해오자 외교관례를 무시하고 두사람의 공사가 17일 동안 남산의 일본공사관에서 함께 머물렀다. 시해 시나리오를 함께 짰을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히다'를 쓴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책에서 "미우라 공사가 부임한 지 불과 1개월 7일 만에 시해사건이 일어났다"며 "따라서 시해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이토 정권이 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고 했다.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이토는 사건 관련자 48명 전원을 소환, 재판에 회부했다가 3개월여 후 모두 무죄석방했다. 이토 정부는 관련자료를 폐기, 왜곡하고 심지어 내각 기밀비로 외국기자를 매수하기도 했다. 이토 정권이 조선경영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이웃나라 황후를 살해한 파렴치한 사건이었다.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의 편저자 계명대 이성환 교수는 "이토는 전형적인 음모가형 정치인"이라며 "그당시 일본 상층부는 한국병합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었다"고 했다.

▶협박과 위협을 일삼다=일본 정부는 강제적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면 노회한 이토 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여겼다. 고무라 외상은 이토의 자택이 있는 도쿄 외곽 오이소로 찾아가 '악역'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토는 4차례 총리를 지내고 추밀원(일왕 자문기관)의장을 맡고 있는 64세의 노인이었지만 "이런 일은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장담했다.

이토는 1905년 11월 9일 특명전권대사로 서울에 입성, 고종에게 온갖 협박과 공갈을 일삼았다. "이토가 고종에게 '외교권 위임'을 내용으로 한 조약 초안을 내놓았다. 이를 읽은 고종은 금방 얼굴색이 변했다. 마음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눈치였다."(주한조선공사 하야시 곤스케 회고록) 이토는 한술 더 떠 "이 안의 수용여부에 대한 결정은 폐하의 자유지만 혹시 거부하면 더 지독한 결과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틀 후 일본군이 덕수궁 주변을 포위한 가운데 이토는 대신들을 불러 모아놓고 일일이 한명씩 조약 찬반여부를 물었다. 11월 18일 오전 1시 본문 5개조로 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 협박과 위협으로 체결된 조약인 만큼 당연히 무효다.

▶분열과 매수=다음해 3월 이토는 일본군 지휘권을 가진 채 초대 통감으로 한국에 부임, 한일합방에 이르는 길을 닦기 시작한다. 한국 지도층을 금품으로 매수하거나 배정자(裵貞子) 같은 밀정을 양성하고 서로를 분열시키는 수법으로 한국을 통치했다. 한일합방에 앞장선 일진회는 일본군의 군사기밀비와 통감부 기밀비로 운영됐고 이토가 거금 5만엔을 몰래 내려보냈다. 겉으로는 '미개한 조선을 바꾸자'며 계몽정책을 앞세우고 뒤로는 악랄한 수법으로 합병을 준비했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이토는 문관이어서 한국의 식민지화에 반대했고 군부가 적극 추진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것은 이토가 무지몽매한 이웃나라 한국을 계몽시키려 한 선각자였다는 일본식 논리다. 이토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라 자신의 국가이익을 지키려 한 정치가였다.

교토대 미즈노 나오키(樹野直樹)인문과학연구소 소장은 "이토는 한국의 합병을 적극 추진한 사람"이라며 "다만 (정치가로서 불필요한 마찰과 희생을 피하기 위해)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했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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