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재의 여담女談] 아름다운 편지

입력 2009-08-28 07:00:00

편지는 그리울 때 쓴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기에 터질듯한 가슴으로 쓰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기에 무너지는 가슴으로 쓴다. 그래서 편지는 간절하고 절절하다. 결코 말이 할 수 없는 깊이와 울림이 있다. 그것이 마지막 편지라면 더 할 듯하다.

시인 안도환은 마지막 편지라는 시에서 '잠들지 못하는 밤/그대의 외딴집 창문이 덜컹댄다 해도/행여 내가 바람되어 문 드두리는 소리로 여기지 말라'며 터질 것 같은 사랑을 토해내고 있다. 그리움의 절규다.

마지막 편지는 이처럼 뜨겁다. 마음이 타들어가고 심장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그런데 최근 한 편지는 아름답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노부부의 마지막 편지다. 열렬하지는 않지만 평생을 동지처럼 살아온 한 여인이 남편에게 바치는 감사와 사랑의 헌사다. 조용하면서 결코 넘치지 않는다. 젊은 부부의 애끓는 이별과 다르다. 바로 이희호 여사가 남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다. 비통에 잠긴 그녀는 끝까지 읽어내려가지 못했지만 그 내용은 참으로 간결했고 아름다웠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용서하며 아껴준 것 고맙습니다."

이 짧은 편지는 수많은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차분히 생을 정리하는 노부부의 깊은 사랑과 신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아마도 한 남자가 아내로부터 받을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듯하다. 그 남편은 아내로부터 평생 존경받고 사랑받았으며 그는 아내를 한없이 용서하고 아끼며 살았던 모양이다.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다. 사실 이들 부부는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세월을 겪었다. 모나고 험한 인생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사랑, 그리고 용서의 마음이 더욱 견고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대방의 존재감과 부부의 의미를 너무 잘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남편도 최근 쓴 일기에서 아내를 향해 "그녀 없이는 지금의 내가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적어두었다. 젊은 부부의 뜨거운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연가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온다. 정치인 김대중. 그를 사랑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한 여인으로부터 이처럼 온전하게 사랑받고 존경받은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가을은 가을인 모양이다. 세상 끝나는 날, 존경과 감사가 묻어있는 이런 편지 한 장쯤 받고 싶어지니 말이다.

sj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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