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2)안동 도산 삼백당 종가 김시필 여사

입력 2009-08-27 11:15:17

"제사 지낼건지 말건지, 판단은 후대들 몫이야"

종가의 여성, 역시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일제강점기, 남북분단, 산업화의 급격한 변화를 겪은 현대사 속에서 이들의 삶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그러한 전면에서 아픔을 겪었다는 판단이 지나치지 않다. 오늘 만난 삼백당 종가의 종부 김시필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 친정 내앞 시절의 추억

삼백당 종부 '내앞댁'이 태어난 곳은 안동의 명문가인 천전의 의성 김씨 종가였다. 1928년생인 그는 2남 5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가 삼백당으로 시집온 것은 나이 20세였다. 큰언니는 박곡 전주 유씨에게, 둘째 언니는 외내 광산 김씨에게, 셋째 언니는 의성 사촌 류씨에게. 일곱째 동생은 영천 행계종가로 시집을 갔다.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중매로 이어지는 안동지역 통혼관례에 의한 것이다.

어릴 때에는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조금 늦게 임하국민학교를 다녀 16세에 졸업한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이 외에는 할 수가 없었고 그의 일본 이름은 '김지시스'였다. 만약 학교에서 일본말을 하지 않고, 조선말을 하면 학생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패(牌)를 조선말을 한 학생에게 준다.

그러면 교사는 패를 받은 만큼 점수를 빼는 등 상호 감시를 하였다고 한다. 교장은 일본인, 교사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반 정도였고 이름을 대면 안동에서 알 만한 사람도 교사를 했다고 한다. 한 학년 1개 반은 60명 정도였고, 5개 분단 중 1개 분단만 여학생이었고, 나머지 4개 분단은 남자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즉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하는 대표적인 분위기였다.

한편 17세가 되자, 어머니께서 가사를 배우라고 권했다. 당시 후조당에서 가지고 온 '회혼앙축가'를 처음으로 배우고 붓으로 가사를 한글로 베끼곤 했다. 셋째 숙모에게 담배도 배웠다고 한다. 당시 양반가의 여성은 긴 대나무 담뱃대에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 어지러운 시대와 어려운 시댁

그가 어릴 때에는 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4명 이상이어서 집에서는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음식도 하지 않은 시절을 보냈다. 늘 손님이 많아서 음식도 풍족했고 사람들이 많아서 심심하지 않게 지낸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중매로 혼례를 치렀다. 남편을 처음 본 것은 혼례를 치르고도 한 달 정도 후였다고 한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못해 신행 때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였던 것이다.

삼백당은 퇴계의 가문으로 알려진 진성 이씨 가문이었지만 시집올 당시 시어른들과 9남매는 문경 노목에서 살았고, 시조부와 조모는 온혜에서 삼백당의 유지를 받들고 있었다. 시댁에 와서 지내는 생활은 유복한 어릴 적과는 다르게 매우 큰 어려움이었고, 매일 눈물로 보냈다고 한다. 인근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남편은 자상하여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신을 달래면서 그렇게 생활해 나갔다.

당시는 좌우파 대립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시절, 보도연맹에 시어른이 핵심적으로 참여하였고, 보도연맹에 연루된 이유로 말미암아 시어른을 대신해 남편이 경찰에 끌려 가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 당시 노목에서는 17명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집단으로 사살당하였다고 한다. 평시에도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남편은 그 후유증으로 척추염을 앓게 된다. 이후 치료를 계속하였으나 그의 나이 39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후 그녀는 슬하의 자제들과 함께 온혜에 들어와 위토를 운용하면서 자식을 키웠다. 아이들은 모두 재능이 뛰어났지만, 넉넉지 못한 경제적 형편은 이들에게 대학을 보내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 제사에 대한 판단은 후대의 몫

처음 시집을 와서 지내는 제사는 12위였다. 모두 자신의 몫이었다. 가장 큰 제사는 역시 온계 선생의 불천위 제사였고, 동짓달에 지내는 이 제사에 그녀는 가장 정성을 들여서 준비한다. 그러나 현재 그녀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이지만, 평생을 충분히 자신의 정성으로 지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앞으로 문중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그는 의견이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미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그가 그러한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 현재 3남 5녀 중 3명이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불천위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교회에 나가게 된 이유는 넷째 딸의 부탁 때문이다. 넷째 딸은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식을 볼 수 있었다고 하였고, 자신에게도 교회를 다니기를 권하였다. 그는 '자신이 자식을 위해서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하는 생각을 하고 교회를 나가게 됐다. 지금 그녀는 매주 온혜교회에 다니는 독실한 신자가 됐다.

◆ 삶은 본시 외로운 것일지도

삼백당은 그가 시집온 곳이고, 그가 태어난 곳은 내앞 의성 김씨 종가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주변에서 '내앞댁'이라 불린다. 아직도 그는 내앞 종가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삼백당 문중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한다.

그러나 삼백당 문중을 만든 송재 선생의 유적은 많지 않다. 종가는 일제강점기에 불탔고 문중 정사라 할 수 있는 취미헌은 현판을 읽어버리고 빗물이 스며들어 겨우 서있는 모습이다. 종가가 없는 가운데 그녀가 반백년을 더 넘게 기거해온 집은 송재 선생의 재사 건물이다.

아직도 그곳은 그 혼자 외롭게 삶을 지키고 있다. 아이들은 도시로 가고 그도 따라가고 싶지만, 도시생활이 맞지 않고, 여전히 그가 편한 곳은 이곳이다. 혼자 있어도 그것이 편하다. 외로움이 몰려오면 서울에 있는 자식을 찾지만, 그는 이곳이 편하단다. 우리시대의 어머니들이 그러한 것처럼…. 여느 농촌의 할머니처럼, 그렇게!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재)안동축제관광조직위 권두현 사무처장 dh4444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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