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아픔 딛고 희망을 찾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베트남의 남부 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호찌민(Ho Chi Minh)은 습지가 많은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17세기 후반 무렵 중국에서 건너온 베트남인들에 의해 개척되기 시작해 프랑스 통치 시절 배수시설이 들어서면서 점차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남베트남(월남)의 수도로 지정, 인구가 급증하였고 1976년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민족 지도자 호찌민의 이름을 따 사이공(Saigon)에서 호찌민으로 도시명이 바뀌었다.
최근에는 베트남 정부의 경제 개방화 정책에 힘입어 베트남 최대 상업 도시로 성장해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활기 넘치는 도시로 베트남의 경제를 이끌고 있는 곳이다.
#호찌민 시내 관광
프랑스 통치 시절 건축된 프랑스 양식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아시아의 파리'라 불리는 호찌민 관광의 시작은 저렴한 숙소와 식당, 여행사들이 몰려 있어 항상 많은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레로이 거리에서 시작된다.
호찌민은 한국처럼 구(區)나 동(洞) 같은 지명이 따로 없고, 12개의 도시 지구와 6개의 농촌 지구로 구성돼 있는데 이 중 레로이 거리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호찌민 최대의 번화가인 1구역에는 고급 호텔, 극장, 여행자들을 위한 선물 판매점들이 밀집하고 있다. 1880년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된 자재들로 건축한 높이 40m에 이르는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솟아 있는 노틀담성당, 그 옆의 프랑스 양식으로 지어진 중앙우체국은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다.
특히 빨간색 벽돌과 화강암으로 건축된 노틀담성당은 호찌민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호찌민에 남아 있는 프랑스 양식 건축물 중에서 예술성이 높은 건축물로 꼽혀 베트남인들의 웨딩 사진 촬영 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화창한 날이면 성당을 배경으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베트남 신부와 신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중앙우체국에서는 그리운 사람들에게 여행의 추억을 담아 엽서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 수 있다.
호찌민 시내 관광의 제일 큰 볼거리는 통일궁이다. 1975년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이 미군 작전본부를 장악하면서 사회주의에 의해 통일이 이뤄졌고 이때부터 '사이공'이라는 이름 대신 '호찌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 계기가 된 당시 미군 작전본부가 통일궁이다.
통일궁은 1868년 프랑스 통치 시대 때 건설돼 프랑스 총독 관저와 베트남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된 역사를 가진 곳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지하 전시종합상황실, 1층 각료 회의실과 식당, 2층 대통령 접견실, 3층 대통령 전용 식당과 극장, 4층 대통령 전용 연회장 등이 있다. 특히 4층에는 월남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두웅 반민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사진과 소련제 탱크가 대통령궁 철문을 부수며 진입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 등 사이공의 마지막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통일궁과 더불어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또 하나의 관광지는 전쟁박물관이다.
전쟁 범죄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로 인한 참혹한 전쟁의 피해 흔적들, 프랑스 통치 시대 때 사용됐던 단두대, 미군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수많은 사진들이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한 무기들과 함께 전시돼 보는 이들로 하여금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어두운 베트남의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의 활기찬 베트남인들의 생활상을 엿보고 싶다면 벤탄 시장으로 가면 된다. 열대 지방답게 다양한 과일과 야채는 물론 의류'식료품'기념품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어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으로 하루 종일 활기가 넘쳐난다.
어떻게 보면 호찌민은 잔혹했던 전쟁 관련 유적만 남아 있는 곳이라 기분 좋은 여행을 하기에는 우울한 곳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조금만 여유를 갖고 둘러보면 아름다운 프랑스 양식의 건축물들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베트남의 현재를 볼 수 있어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베트남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구찌터널 (Gu Chi Tunnels)
베트남 북부에 하롱베이가 있다면 베트남 남부에는 구찌 터널이 있다. 구찌터널은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굴을 파서 만든 지하 요새로 호찌민에서 4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베트남전 당시 세계 최고의 정보력과 화력을 보유한 미군들도 끝내 지하 요새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고엽제를 살포하고 구찌 마을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쏟아 부었으나 결국 구찌터널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3층의 구찌 터널은 1층 3m, 2층 5m, 3층 8m 깊이로 만들어 어떠한 외부 공격에도 견뎌 낼 수 있었으며 내부에는 작전실, 회의실, 수술실, 식당, 숙소, 군수품 저장고 등을 두고 있다.
가이드를 따라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내부가 입구에 비해 크게 넓은 편이 아니라 이동하는 데 무척이나 힘들 정도다. 좁다고 느껴지는 내부도 관광객들을 위해 원래 크기에서 두 배 정도 확장해 놓은 것이라 하니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들이 왜 구찌터널을 파괴시키지 못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구찌터널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수십㎞로 만들었다가 미군과의 전쟁 때 연장해 총 길이가 400㎞에 이른다 하니 오로지 호미와 흙을 담아내는 작은 삼태기로 구찌 터널을 만든 그들의 노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종욱
[TIP] 쌀국수 '퍼' 꼭 먹어 보세요
베트남 여행에서 꼭 먹어봐야 할 것이 있다면 베트남 쌀국수인 '퍼'(Pho)이다.
저렴한데다 맛이 좋아 베트남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퍼는 19세기 하노이를 지배했던 프랑스 귀족들이 소의 고기만 먹고 뼈를 버리자 당시 빈곤했던 베트남인들이 그 뼈를 모은 뒤 끓는 물에 푹 고아서 국물을 내고 쌀국수를 말은 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베트남 전역으로 번져 나갔으며 월남전 이후 세계 각지로 흩어진 베트남인들로 인해 현재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퍼는 소고기가 얹혀 나오지만 지금은 닭이나 돼지를 얹거나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야채만 얹혀 나오는 등 다양한 종류의 퍼가 판매되고 있다.
#차량 이동시간 많이 걸려요
호찌민이나 근교 이동 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승용차나 승합차를 타고 이동하게 되는데 한국과 비교해 이동시간이 몇 배는 더 걸린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베트남은 차량보다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시내에서는 오토바이 때문에 차량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시내를 벗어나면 오토바이의 수는 시내에 비해 많이 줄어들지만 도로가 넓지 않고 자전거'우마차 등과 같은 재래식 이동 수단이 많아 제 속도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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